그런데 근래 자료를 찾다가 관련 사항을 연구한 일본측 블로그 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인데 일단 수량적으로 한두개가 좀 안맞기는 한데, 일단 일제당시에 10량 납입이었지만 실제 계획발주량은 26량으로, 이중 20량이 경원선 6량이 중앙선(당시의 경경선) 용도로 발주가 결정이 되었고, 해방 직후에는 9량 중 8량이 북측에, 1량은 중정비 혹은 투입준비 단계에서 남한 용산공장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관페리 수송을 기다리던 1량이 일본 국내에 남아있어서 당시의 10량은 확정가능한 수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려지지 않은 물량 이야기가 확인이 되는데, 일제당시에 공사 우선순위 변경으로 포기되었다고 생각한 제천~풍기 간의 전철화 공사가 의외로 빠른 시점인 1946년에 미 군정청에 의해서 재개 결정이 났었고 이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 차량생산이 재개되어, 전후 생산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당대의 신문기사에서도 언급되는데 1947년 시점에 4량의 전기기관차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알려져 있고, 실행중이었던 사안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4량의 생산품은 실은 일본에서 전후에 생산된 것으로, 해당 블로그에서 자료를 파악한 결과로는 전전의 1량을 포함해 7량이 미국 원조자금을 통해 미군정청(미8군)과의 계약으로 일본으로부터 수출되어 한국에 반입되었다고 합니다. 즉, 8량이 남한 내에 한국전쟁 당시까지 있었던 셈이고, 이 차량은 아직 공사가 진행중이다 보니 용산공장이나 부산공장에 유치되어 있었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용산에 있던 차량은 북한에 의해 노획당해 멸실되었으며 1량이 부산에 남아있다 해방 후인 1958년 경에 폐차 해체된 것이라 할겁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기간이 거대한 단절기였던 것 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해방직후에 중단상태에 빠졌던 수송이 이후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1946년 부터는 일제당시의 계획사업들을 하나 둘씩 되살려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일본인 관리자들과 기술자들이 빠져나간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도국은 건설사업을 하나 둘씩 재개하기 시작하던게 의외라 할겁니다. 철도라는 기업 조직의 저력 내지는 강인함이 느껴진달까.
그리고 여기서 좀 의외라 생각되던 제천 분공장 설치건이나 영월 화력발전소가 왜 일제때 지어졌고 해방후에도 우선순위를 일찍 받았는지 알것 같습니다. 전력수요처가 별로 없는 영월같은 산골에 왜 발전소가 있었는지의 답이라면 답인데, 바로 철도전력 공급목적의 발전소였기 때문입니다. 영월에 둔 건 그나마 탄전이 가깝고 비교적 큰 하천을 끼고 있어 용수확보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던 것이고 말입니다. 또한, 한국전쟁기에 디젤기관차의 거점공장으로 제천분공장을 두었다는 언급도 해방전에 전철화를 대비하기 위해 지어졌던 각 설비를 활용해서 였던 셈입니다. 또 결국 활용하지 못하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이 전쟁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제천~풍기간에 전철 공사가 어느정도 되어있던 이유도 여기서 확인이 되는 셈입니다.
뭐 당시 전쟁으로 결국 3000V전철화가 유실된 덕에 어쩌면 지금의 교류전철화 일색이라는 편익을 누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좀더 빨리 기술적인 다양성을 갖추게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