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로는 확실히 애매한 차기는 합니다. 한국철도에서 EEC이래 멸족되었던 간선전동차를 되살려낸 존재이고, 고성능 전동차의 가능성을 제대로 입증해 준 차량이기는 하지만, 정작 투입구간은 1급선구라기 보다는 일종의 갭 필러에 불과한 서울~천안~신창 간으로 한정된데다, 그나마도 4량편성으로 공급량 면에서 아쉬움이 많은 면이 있습니다. 통근수요를 많이 잡아주는 열차지만, 이것도 결국 아침 첫차가 부족한 일반열차 틈바구니에 끼어있기에 그런거라 할거고, 그것도 공급량 문제 때문에 중련투입같은걸 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차는 좋은데, 선구나 수요조건에는 마땅찮은 그런 차라 평가를 할만 합니다.
누리로는 사실 사용조건으로 본다면 대전-광주간이나 익산-여수엑스포, 동대구-마산 정도의 셔틀수송에 더 걸맞는 차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익성은 개판이 되는 구간이지만, 셔틀수송일수록 기관차 견인 열차는 낭비가 심해지는 면이 있고, 또 기민한 차량이라면 전구간 셔틀 수송 외에 단구간 셔틀, 예를 들어서 익산-광주나 광주-목포 간, 익산-전주간에 여유시간에 반짝 알바를 뛰고 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융통성있는 운용을 하기도 좋습니다. 차량의 신뢰성이 담보가 되긴 해야겠습니다만.
반대로 현재 투입구간인 서울-천안-신창 구간은 통근시간대 과밀은 말할것도 없는 노선인데다, 서울-천안간은 은근히 간선열차 수요가 많이 분포한 구간이어서 4량편성 보다는 본격적인 대량수송차량, 예를 들어 해외에서 쓰이는 2층 차량 같은게 6~8량 편성으로 투입되어도 될 정도의 선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특히 수원-서울간은 손바뀜도 손바뀜이지만 수요자체도 압도적인 수준이기도 합니다. 그게 저가덤핑에 의한 면도 있기는 합니다만서도. 현재 여기에 맞는 차량이 마땅히 없지만, 그나마 가깝다면 ITX새마을이 운임빼고는 최적인 선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리로를 빼고 나면 ITX새마을이 운영 조건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됩니다. 첫째는 장항선에서 제대로 간선전동차를 회송시킬 여건이 전혀 안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신창역이 현재 누리로의 거점으로 쓰이는데, 여기의 설비여건은 오로지 고상홈만 되어 있는데다, 인상선 2개가 예비유치선 정도로 쓰이는 그야말로 "단촐한" 역에 불과합니다. ITX새마을을 투입할 경우 인상선의 규격문제도 문제겠지만, 가장 먼저 고상홈 정차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ITX새마을은 저상홈 전용 차량인지라 누리로의 양용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 자체가 대규모 개조가 되는 상황이고, 또 개조할 경우 다른 구간에서는 쓸모없는 설비가 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뭐 당장에 누리로도 고상홈 대응은 서울역과 신창역만 쓰고, 저상홈 정차를 할때 안전장치 동작 때문에 아침저녁에는 홍역을 치르는 판인데, 쓸 수는 있는 것과 아예 없는건 다른 문제인지라 이게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둘째는 운임 문제입니다. 일단 ITX 새마을은 새마을호 운임에 준하고 있는데, 누리로는 무궁화호에 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운임인상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기 쉽고, 특히나 서울~천안간이 통근수송에 의존하는 상황에서는 이 점은 굉장히 민감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냥 이런 비판을 뭉개고 새마을 운임을 받아서 다니려고 한다면 아무래도 통근혼잡을 이용한 무궁화호 정기권 이용자 등의 부정승차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은지라 이것도 과제가 될겁니다. 더욱이, 현재 무궁화만 정차하는 안양, 오산, 서정리, 성환 등에 새로 새마을이 들어가게 되면서 열차간의 위계 문제도 새삼스럽게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지라 이 부분은 어설프게 건들면 복마전을 헤집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일단 이런 현실적 문제만 없다면 ITX 새마을이나 2층차량 신조를 통해 피해가는게 낫기는 합니다. 그런고로, 누리로 폐지 문제는 전형적인 과거의 레거시를 깨야 하는 판이라는 점에서 쉽지가 않은 문제인데, 그냥 단순히 여객열차만 보기 보다는 아예 광역전철 까지 결부해서 좀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천안-신창이나 평택-신창 간의 4량편성 전동차를 투입한 셔틀수송을 15분 배차 정도로 증차하면서 아침시간대엔 아예 10량편성 급행을 누리로 정차역에 연장투입하여 누리로 폐지를 메꾸고, ITX새마을은 온양온천-신창간은 회송처리를 하는 식으로 해결을 보는 방법이 단기적으로 가능할겁니다. 장기적으로는 신창~홍성 구간의 복선전철화 내지는 단선전철화를 하면서 홍성역에 서해선과 장항선 전동차를 위한 거점을 신설해서 서울~수원~천안~홍성간의 전동차 투입으로 장항선-서해선간 열차편성 조정에 대비하는게 필요할겁니다.
P.S.:
광주~광주송정간 셔틀수송에 누리로를 빼 충당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엑스칼리버로 치킨집 차리겠단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광주선에는 R=300커브를 비롯해서 건널목까지 도처에 있고, 결과적으로 150km/h급 성능을 내는 고성능 전동차를 넣는건 낭비 중의 낭비라 할만 합니다. 대구~광주간 각역정차 서비스의 연장 정도로 하루 2~3왕복이나 뛸 생각이면 모르겠지만, 이정도 셔틀 서비스는 솔직히 안하느니만 못한 일인지라, 아예 홈을 고상홈으로 정비하고 통근형 전동차를 1시간 1왕복 정도로 꾸준히 박는게 나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