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선은 해방 이후 분단상황에 놓이면서, 경원선을 경유하던 영동-영서간의 교통이 사실상 두절됨에 따라 상당히 긴박하게 동서간 횡단교통선으로서 추진된 바 있습니다. 영동선 경유 강릉행 무궁화호가 없어질 적에 6시간 반 정도로 이미 경쟁력이 없다고 취급되었지만, 해방정국 하에서는 아예 배로 넘어가던가, 포항이나 원주에서 육로로 넘어가야 하는 격오지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또한, 분단으로 평양 등지의 기 개발된 석탄이나 수력발전소 전력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동력자원으로서 삼척(현재의 태백, 도계 일대) 탄전 개발이 중요하게 되면서 당시의 교통부는 물론이고 육군 공병대까지 투입하는 그야말로 돌관공사에 가까운 추진을 보였던 구간입니다.
물론, 생짜로 선로를 놓은 건 아니기는 합니다. 일제 말엽에 이미 해운이 마비지경에 빠지자 대체수송로 차원에서, 또 연선 자원 확충이라는 명목으로 영주에서 내성(현재의 봉화)까지 철도를 부설하였고, 여기서 다시 춘양까지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자료에 따라서 건설상황은 다르긴 하지만 내성까지 궤도가 부설되어 시운전 직전까지 갔다는 말도 있고, 또는 시운전을 하다 기관차가 넘어져 포기했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이때 춘양까지는 토공 등이 이루어져 있었다는 48년도 기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다만, 해방 후에도 사용에는 이르지 못했고 수해로 유실된 구간도 존재했다고 하여, 사실상 미완성인 채로 방치된 노선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는 즉슨, 춘양역의 설치 자체는 이미 일제 말엽에 위치를 거의 확정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영동선의 건설 시점으로 미루어서 핌피를 행사했다면 48년에서 49년에 했다는 이야기인데, 뭐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긴 합니다만 좀 뒤숭숭한 이야기가 됩니다. 어차피 당대의 춘양은 연선에서 몇 안되는 규모있는 집락이기도 했고, 아무리 운탄선로 목적이 강하다지만 적소에 배후인구를 가진 역을 두는게 바람직하기도 하니. 또, 일찌감치 폐광인 듯 하지만 춘양에서도 무연탄 발송이 있었다고 하니 아예 역의 존재 이유가 애매한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여기까지 읽어 왔다면, 역의 입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선로를 그렇게 빙 둘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있을겁니다. 이건 의외로 명백한 부분이라면 부분인데, 실은 고저차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평면지도상에서는 고저차를 직접 눈치채기가 어렵지만, 지형도나 스트리트뷰 같은 걸로 도로와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을 살펴보면 상당히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형도상으로 춘양역 주변의 고도는 300m 내외지만, 춘양공용 버스정류장 인근의 철도 높이는 320~330m 정도까지 고도가 올라가 있습니다. 즉 선로가 보기보다 경사를 제법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배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로를 빙 둘러가는 우회선으로서 부설되어 있다는게 맞습니다.
현 36번 국도처럼 질러가는게 지금 관점에서는 바람직하겠지만, 해방 당시의 기술이나 경제력으로는 그렇게 긴 교량과 토공, 터널을 두는 건 도저히 무리였던 시절입니다. 안그래도 영동선 건설계획 자체가 그야말로 터널과 토공, 교량의 연속인 상황이고, 대한민국이 감당할 만한 수준의 건설사업을 넘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분천~철암 구간의 막대한 토목소요를 생각하면, 그 외 구간에서는 기존에 건설된 부분을 최대한 활용하고 가급적 토목공사 소요를 줄이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을겁니다. 뭐 일제당시의 건설선 자체가 저규격 선로다 보니 지금 관점에서는 한숨나오는 철길이긴 합니다만.
여하간 억지 춘양이라고 하는 말은 좀 호사가들이 지은 말이라 해야 할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이른바 "짜르의 커브"랑 비슷한 도시전설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