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열차의 표정속도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빠른게 최고 아닌가?"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볼때 표정속도 문제에서는 10분 이내, 대충 체감적으로 장거리 열차 소요시간의 5%~10% 정도로는 별로 티도 안난달까, 그런 영역이긴 합니다. 그정도 시간은 역의 동선이 좋거나, 주차나 시내교통으로의 환승 같은 문제에서도 해결이 되고, 또 대기시간 같은거에 뭉개지는 영역이다 보니 대대적인 개변이 없는 한에는 생각만큼의 중요 요소는 아닙니다.
반면, 정차역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수요의 변동이 굉장히 크게 생깁니다. 물론, 현재의 수요구조는 경부선의 주요4역과 천안아산, 광명 2개 역을 포함하면 전체 KTX 승하차량의 70%를 잡아먹고 있기는 합니다. 문제는 나머지 30%의 롱테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30%를 아예 순삭시켜서 저 6개역에 추가로 공급하면 더 증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만큼 자신있게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거점역 간을 빠르게 연결하는게 고속철도의 사명인건 맞고, 그게 대전제가 되어야 하는게 맞습니다. 문제는 지방역들을 지탱하는 연계교통이 취약한데다, 이걸 강화하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대전, 대구, 부산 3개 지역은 지하철망을 가지고 있고 대도시 답게 버스 교통이 비교적 공급되고 있지만, 이들 지역이 광역거점으로서 주변 도시와의 빈번한 로컬 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기가 애매합니다. 따라서, 거점간의 고속이동만으로는 철도로의 모달 쉬프트를 일으키고, 철도 이용율을 올린다는 거시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한계가 있다 할겁니다. 그렇기에 기존선 직결이나, 무리수가 심해서 울산, 신경주 정도를 빼면 실패한 감이 있지만 정차역 추가 정책이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처럼 등급화를 하지 않는가를 따져볼 수 있을겁니다. 도카이도 신칸센 같은 경우 노조미는 200km/h가 넘는 표정속도를 뽑지만, 정차역이 극히 한정적인 고로 이를 벌충하기 위해 하위등급인 히카리, 고다마를 운용하고 있으니 이런 방식으로 체계를 꾸미면 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겁니다. 뭐 고다마 표정속도가 120km/h 를 겨우 마크하는, 좀 빡빡한 우리나라 기존선 열차를 살짝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적인 풍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단 기존선과 고속선이 둘 다 대량공급되는게 서울~금천구청간의 병목으로 인해 불가능하니, 결국 둘 간의 공급비를 맞춰야만 합니다. 뭐 당장에 기존선은 만차 태워도 적자라는 한계가 있는 것도 있지만, 그건 좀 차치하고 말입니다. 즉, 이미 갈라먹기가 들어가다 보니 KTX거점역과 기존의 중간역들을 이어주는 공급이 일단 부족해집니다. 이로 인해서 KTX가 이 부족한 공급을 매꿔주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에 또 한가지 문제는, 기존선 직결계통이 여럿 존재한다는 문제입니다. 분기형의 노선계획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 바로 이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서 모든 열차를 5분 시격으로 서울/용산에서 각지로 쏘아보낸다고 하고, 기존선의 배분은 신경쓰지 않고 한다 했을때, 현재의 본선(경부/호남)과 직결계통(경전, 동해, 전라, 서대전경유, 수원경유)의 7개 루트를 순차 배분하더라도 40분째에 겨우 본선계통의 순서가 돌아오게 됩니다. 이 말은 등급화를 하려고 해도 배차가 이미 40분에 1대 꼴 모양이 되어있으니 의미가 없어진달까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등급을 추가해도 40분의 격차가 나지 않으면 구분의 실익이 없고, 또 그렇게 하는 순간 한 등급의 열차를 80분에 1대꼴로 투입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니 추월이고 완행/급행이고 이미 의미가 없어진달까.
그리고 한국적 풍토의 끝판왕, 환승을 싫어하는 경향이 이런 등급화를 하면 확실히 안되게 해줍니다. 일본식의 등급제 시스템은 대충 최상위 열차의 정차역이 거점이 되고, 여기서 중간역으로는 환승을 이용해 가는게 통상적으로 가장 빠른 루트가 됩니다. 환승편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환승을 안하고 가면 시간에서 손해가 막심하게 돌아갑니다. 독일의 경우도 ICE네트워크는 1시간 내지 2시간 당 1편으로 뿌리고, 이걸로 거점역에서 IC/RE/S-bahn같은 지역내 철도로 갈아타면서 이동하는게 최적해가 되고, 애시당초에 장거리 직통은 잘 없거나 아주 특수한 계통이거나 한 예가 많습니다. 환승이 잘 되어 있는 덕도 있지만, 이게 어느정도 체질화 되어서 환승에 거부감이 강한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환승 이용에 대해 거부감이 굉장히 강한 편이고, 그래서 서울~대전 정도면 아예 기존선으로 30분 정도 손해보더라도 환승이 적은 쪽을 고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자기가 다니는 경로에 KTX가 부실하면 정치적 압박을 일으키고 민원을 퍼붓는 경향까지 나타나는지라, 그야말로 기술적 최적화를 한다고 되는 그런 여건이 아니랄까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봤자 이득이 안되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는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등급화를 위한 기반자체가 배차의 문제 등으로 안되어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표정속도 강화를 섯부르게 고르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바로 정시율 문제입니다. UIC기준에 따라 15분 기준 정시율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는게 현재의 KTX지만, 정부나 정치에서는 5분이하, 더 나아가서 아예 1분 이하가 아니면 KTX의 정시율은 기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 1~2분은 서울역에서 출구계단 정체에서 뒷쪽으로만 밀려도 금방 뭉개지는 허무한 시간임에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공칭속도를 낮추고, 여유시간을 더해 정시율을 극단적으로 관리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실제 낼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낮은 수준의 시간에 머무르는 면이 있습니다. 5분 당기겠다고 아둥바둥해봤자 알아주기는 커녕 욕만 쳐먹으니 누가 이걸 하겠습니까.
결국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속도를 희생하더라도 정차역이나 경유지가 다변화된 현재 체제가 현재의 환경조건에서는 최적에 가까운 구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시스템 전체로서의 효율성이 반드시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결국 수요와 환경이 그걸 원하는 방향이 되니 그렇게 따라가도록 진화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앞으로 지방광역철도가 보급되는 등 기저수요 연계문제의 가장 큰 빗장이 풀리기는 합니다만, 대신 직결계통에 수서가 추가로 끼어들면서 배차가 더 꼬이는 환경이 나오게 될 판이라 일본처럼 극단적인 컴팩트 구조로 가기는 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래서 향후의 고속철이 계속 정차역을 늘리고 소요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이건 당연히 아니기는 합니다. 다만, 등급제나 표정속도 지상주의로 접근하는게 실제 현실에 부합하지는 못한다는게 현실이고, 이 둘을 비교형량하면서 향후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게 남겨진 과제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