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늦게 뒤적거리다 우연찮게 발견한 영상인데, 뭔 신호뇌관들을 선로에 와장창 깔아서 터뜨리고 경적을 마구 울리는 광경에서 뭔가 행사같기는 한데 해당 열차나 노선의 종운식 정도쯤 되는게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해당 노선의 기관사가 정년을 맞아 퇴역할 때 저렇게 마지막으로 모는 열차가 도착 또는 출발할 때 저렇게 한다는 듯 합니다. 유럽에서도 다른 나라에는 없고 프랑스에서만 저러는 모양이라는 거 같습니다.
다른 은퇴열차를 찍은 영상을 보면 헤드마크와 깃발을 따로 만들어서 열차에 걸고, 역 구내 선로에 비상시 쓰는 신호뇌관들을 줄줄히 매달아 놓고, 열차에 비상등(점멸하거나 아니면 교호로 점멸하는)을 키고 경적을 마구 울리며 진입하는게 일종의 관례(?)인 모양입니다. 심지어 열차 뒤나 진입선로에서 신호염관을 터뜨려서 불꽃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난장판을 벌입니다. 항의가 들어올 법도 한데, 의외로 역에서 안내방송도 제대로 하고 또 이용객들이 구경 내지는 촬영까지 하는 걸 보면 나름의 문화기는 한 모양이랄까.
여러모로 재미있는 광경인데, 일단은 저기에 쓰이는 모든 기물들이 열차가 사고가 났을때 비상용도로 사용하는 물건들이라는 점입니다. 신호뇌관(detonator)은 선로에 붙여서 열차가 밟을때 폭발하여 폭음을 일으키는 장치로 보통 선로차단공사를 하거나 열차가 고장으로 섰을때 그 전후에 최후의 경고장치로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또 영상에서 기관차 뒤쪽에 창 밖에 걸린 불꽃은 신호염관(signal flare)라 불리는 물건으로, 비상시에 차장이 들고 후방으로 뛰어가면서 후속열차를 잡아세우는 신호를 할때 쓰는 물건입니다. 또한 열차의 전조등을 교호 또는 동시에 점멸시키는 건 미국 등지에서도 쓰는 경고 내지는 비상신호 방식이고, 경적이야 더 말할것도 없을겁니다. 이들은 매우 엄격하게 다뤄져야 하는, 특수한 비상장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즉슨 은퇴하는 기관사가 평생 한번 써볼까 말까한 이런 기물들을 마구잡이로 소비하면서 마지막 액땜 내지는 성취를 기념하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뭐 좋게 말하면 그런거고, 나쁘게 말하면 제대군인들이 전날밤에 난장판을 벌이는 그런거랑 일맥하는, 마지막 가는 길에 모든 저지리를 질러보는 그런 행사인 셈입니다. 뭐 이런저런 비상용구들을 마구잡이로 써본다는 점에서 그 자체를 경험하고 익숙해지는 효과가 있으니 꼭 부정적인 건 아니란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뭐, 이걸 두고 근래 시끌벅적한 프랑스의 철도개혁에서 떠들어 대듯이, 철밥통 패거리즘의 고립된 문화라고 욕할 수도 있기는 할겁니다. 사실 저런 식의 일탈행위라는게 좀 특수한 계층 내지는 집단내에서 잘 생기는 현상이기는 하니 말입니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수송일선에서 30년 이상을 큰 사고 없이, 또는 질병이나 신변상의 문제 없이 경력을 마친 사람만이 저런 미친짓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철도 일반이 근로여건이 사회평균보다 심하게 막장은 아니지만, 증기시대의 기관사는 13~15세에 차고의 청소나 급유급수같은 허드렛일로 시작해서 매연과 고온에 시달리며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살아서 은퇴를 맞이하는 것 자체가 나름의 성취이던 시절이 있던지라 저런 관례가 생겼으리라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는 기대하기도 힘들고, 사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저런 행사를 하는게 없다는 듯 합니다만... 저런 식으로 사회일반에 보여줄 수 있을만한 은퇴행사 같은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거 같단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