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명확히 다룰만한 자료가 일단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북한측의 문헌자료가 제대로 공개된 게 없고 그나마 있다손 쳐도 실패를 인정하는게 불가능한 독재정, 순화된 표현으로 유일령도 국가의 자료라는게 할 이야기가 뻔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넘겨짚기 식으로 떠들기에는 모두가 부담스러운 이야기라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추정을 곁들여서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철도의 시초는 일제의 패망으로 사실상 체계가 붕괴된 것을 남은 현장 경험자들의 손으로 고군분투 한 데에서 시작을 합니다. 어찌되었든 해방공간 하에서 철도 운영을 복원해 냈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제 패망 직후보다 더 심각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상태로 퇴보하게 됩니다. 여기서 있는 자원 없는 자원을 동원하고, 냉전체계 하에서 각각의 진영에서 원조를 받아 철도망의 복구에 나선 것은 남이나 북이나 같습니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서는 공업기반을 해방시점에 제법 가지고 있었기는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피해가 큰데다 원래 설비 자체가 당시로서는 썩 크지도, 고도화되지도 않은 구 일본제 설비 위주였기 때문에 생산량이 충분했을리는 없었을 겁니다. 특히 가장 관건이 되는건 철도에 사용되는 철강품, 대표적으로 교량 등의 철구조물과 레일을 들 수 있을겁니다. 철구조물은 폭격이나 파괴활동으로, 레일은 여기에 마모와 열화로 소모가 계속되는 자재인 만큼 이 둘의 자급은 철도망의 정상화에 직결된다 할 수 있지만, 생산량은 한참 모자랐을 겁니다. 같은 문제를 2차대전 즈음의 일본도 겪었던 일인지라.
그런 상황에서 당시 복선이 부설되었던 경의선 등의 자재류는 당장의 열차운행을 위해서 유용해 볼만한 시설이었을겁니다. 실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일본도 이른바 금속류회수령이라는 입법을 실시해서, 1943년부터 일본 본토 및 식민지에 대해서 레일을 공출해 주요 병참로의 건설 및 보수에 활용한 바 있기도 합니다. 이때의 경험도 있고, 어차피 복선이 필요할 만큼의 교통량도 당분간은 나오지 않을거라 예상이 되니 급거 교통망 자체를 복원하는데 초점이 갔을 겁니다. 여기에 분단 상황으로 네트워크 자체가 협소해졌고, 또 병참선 확보 등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선이 필요한 상황이었을테니 이른바 주건종개(主建從改)가 강조되었을 거라 봅니다.
이후 주건종개를 축으로 한 철도 건설 정책을 진행하면서 구식의 증기기관차에 의존한 수송으로는 수송능력의 포화가 빠르게 다가왔을겁니다. 특히나 삼면이 바다인 남한이 우회도는 크지만 선편으로 화물을 동서간에 융통할 수 있던 것과 달리, 북한은 오로지 평원선(평양~고원간, 현재의 평라선 구간) 단선 한가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여기서 대두된 것이 바로 전철화입니다.
북한의 전철화는 일제때 경원선의 산악형 전기운전 구간을 이어받아 시작했기에 이걸 응용해야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나왔을겁니다. 뭐, 남한도 사실 1946년부터 산악구간인 중앙선 단양~풍기 간의 전철화를 GHQ가 일본으로부터 자재와 차량을 구입해서 착수하려 했던 전력이 이미 있을 정도니 이 발상이 아주 새로운것도 아니긴 했고 말입니다. 실제로 소련 등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아 1956년에 양덕고개를 전철화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보유했던, 그리고 전쟁통에 한국이 중앙선용으로 확보한 일제 전기기관차를 노획해 가지고 간 것까지 포함해서 어느정도 세력을 확보해 있었고, 변전소 설비나 전차선 등도 원조받은 품목과 경원선 단절로 발생한 철거 내지는 잉여품들이 있었을테니, 조달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을겁니다. 여기에 수력발전소가 비교적 풍부하게 있던 북한측은 전력 조달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테니, 조건 자체는 유리했던 택입니다.
전철화가 왜 효율 개선에 기여하는가 하면, 당시의 증기기관차는 아주 고성능의 것이어야 1500마력을 마크하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구배선에서는 점착력을 살리기 어려워서 견인능력이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전기기관차로 바꾸면 당대의 조악한 기관차라도 산악구간의 급경사에서도 충분한 견인능력을 보일 수 있는데다, 속도 또한 최고속도는 동등, 실제 부하운전에서는 증기기관차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터널 구간에서 질식사고가 나거나, 물과 석탄 수급에 애를 먹지 않아도 되며, 정비성도 한결 나은지라 수송능력 개선에는 직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전철화의 핵심 논리는, 복선철도와의 비교에서 나오는데, 당시엔 토목비용은 일단 어마어마한 비용과 자재, 노동력을 소모하는게 보통이고, 차량 면에서도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기관차를 다수 구입해야 하니 그야말로 이중고를 겪는 방향이 됩니다. 여기에 비해서 전철화를 하게 되면 전력설비 비용은 늘어나지만 대신 건설비용은 확연하게 깎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기관차도 대당 단가는 확연히 비싸지지만 대신 총 구입대수를 줄일 수 있어서 그만큼 운영비용을 줄일 수 있고, 동력비도 수력을 게재한다면 석탄보다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니 합리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은, 남한도 1960년대 말에 비슷한 논리 하에서 당시 일부 착공까지 했던 중앙선 복선화를 포기하고 중앙, 영동, 태백 3개 산업선의 전철화로 가닥을 잡았던 전례가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에는 일반적인 방향이었다 할겁니다.
그리고 당시엔 나름대로 전후복구도 잘 되었고 비슷한 수준이던 중국도 소련의 기술협조를 받아 1950년대에 전철화와 전기기관차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1959년에 실제로 소련의 VL60형 전기기관차를 라이선스해 시제차를 만들기까지 합니다. 수정주의 논란으로 중소대립이 심해지면서 한참 밀립니다만. 북한 또한 1961년에 체코제 E499.1형 전기기관차를 도입해 조립하고, 이후 이걸 국산화해서 "붉은기1호"를 만듭니다. 차도 외국산 설계 기반에, 아마도 부품은 대부분 외국산을 쓰긴 했지만 저 시점에 자체 생산을 했다는 점에서 꽤나 선도적이었다 할겁니다. 실은 그 시점에 남한도 전후 복구 이후 인구급증으로 전철화 시도를 하지만 자급능력이 없다보니 시도를 못하던 상황이던지라 대비가 꽤 되는 상황이기도 하고.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습니다.
여기서 전철화의 취약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차당 수송능력에서 효율적이고, 비용면에서도 이득이 큰 전철화에 취약점이 무엇이 있는가? 라고 생각할건데, 실은 전철화에는 전력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즉 전력 수급이 잘 되어야만 굴릴 수 있고, 또한 원래 없던 전철화 설비를 대량으로 들여야 하니 전력설비라는 제약조건이 하나 추가가 됩니다.
북한은 발전 설비면에서는 일제 후반의 중화학공업 투자 덕에 수력자원을 제법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흥남비료공장 같은 곳들은 전력다소비형이었고, 이걸 화력으로 때우긴 어려운지라 수력발전소를 통한 전원 개발이 필요했기에 전쟁피해를 상당히 입었다 해도 복구불가능한 수준은 아니긴 했습니다. 여기에 민수용 전력 소요량 자체도 미미하던 시절인 만큼, 이 풍부한 수력자원을 기반으로 전기철도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볼 수 있었을겁니다.
이것만 보면 단선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핵심인 전기기관차의 수급도 가능해졌고, 전력자원이 풍부해서 전력 수급에 문제도 없었다면, 오로지 건설비 하나때문에 단선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마지막 퍼즐 하나, 바로 전력설비의 문제가 남습니다.
지금이야 변전소 용량 키우는거야 설계나 예산, 그리고 기술적인 필요성의 문제지, 기술적 제약이 복잡하게 걸리는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뭐 실제 변전소의 운영은 보기보다 복잡다단하다고 합니다마는, 하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대의 철도 변전소는 사실 매우 난해한 설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전철화는 일제 말기에 도입된 3000V 직류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3000V직류 전철화는 1930년대 중반에는 유럽에서도 최신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당시 일본에서도 탄환열차 계획을 검토하면서 막 개발에 착수해 결과를 냈던 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이걸 전시체제 하의 통제경제 하에서도 식민지에 써보려고 했던건 당대에 꽤나 튀는 사안일 정도였고, 이후 소련이나 이탈리아 같은데서도 전후 3000V직류를 기본으로 전철화가 진행이 되던 나름 전도유망해 보이던 기술이었습니다. 물론, 간선철도에는 교류전철화가 주류가 된 지금에야 저게 썩 좋은 결정이 아니었지만, 저당시에는 교류전철화는 매우 까다롭고 난해한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술에 속했었습니다.
직류전철화와 교류전철화의 핵심 차이는 발전소로부터 송전되어 온 교류 고압전류를 어느 단에서 차량에서 쓰기 좋은 전압과 전류로 바꿔낼 것인가에 있습니다. 교류전철화는 러프하게 말하면 고압전류를 차량단까지 보내서 차상에서 변전을 해치우는 것이고, 직류전철화는 반대로 지상측의 변전소에서 모든 변전을 끝내서 차량을 간소화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수은 정류기는 진공 공간에 수은을 기화시켜 전극 간에 아크를 발생시키는 식으로 동작하는 물건인데, 손이 많이 가는건 물론이거니와 싸게 마구 찍어낼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더 재래식의 회전변류기로는 고압 직류를 다룰수가 없어 대체도 불가능한 그런 물건입니다. 이걸 덜컹거리는 차에 올려서 써야하던 초기의 교류전철화는 그야말로 신뢰성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달까 그렇습니다.
이 까다로운 수은 정류기의 조달과 사용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을거라는건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더 걸리는 건, 이 까다로운 물건이 또 용량이 충분한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구리를 대량으로 써서 전차선을 만들어 설치해야 하고, 지금은 우습게 다뤄지지만 공업기반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전동기 등 전기기기류들이 워낙 많고 이들 다수가 수입자재에 의존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그 이상의 대대적인 질적 투자를 누적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단선구간에서 수송력을 뽑아먹기 위한 불충분한 용량의 전철화 까지만 할 수 있었던게 한계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런 궁상은 사실 1960년대까진 남한이나 북한이나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취약한 사회경제 하에서, 원조에 의존해야 하던 경제상에서는 어쩔 수 없던 것이라 할겁니다. 여기에 일단 철도망 자체의 확장을 우선시하던 1960년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저런 설비를 개량, 증설하기 보다는 당장에 노선 연장을 늘리고 전철화의 수혜를 받는 구간을 늘려나가는게 더 중요할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이건 비슷비슷한 상황이고.
하지만, 정치적 격동을 겪으면서 정책 방향의 좌충우돌이 제법 있었고, 또한, 그런 과정에서 서방 국제사회의 다양한 경험을 섭렵해 볼 기회가 생겼던 남한과 달리, 북한은 저때 이후 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면서 정책노선의 변화가 수반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으며, 이후 자력갱생 등의 구호 하에 1980년대에는 기반기술의 변화 없이 전철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물론 기술적 변화를 전적으로 거부하면서 독자노선을 그대로 걸은 건 아니었을겁니다. 하지만, 전철 시스템은 한번 표준이 정해지면, 그걸 바꾸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이 들어가거나 중간적인 기술들을 여럿 개발 적용해야 하는 난점이 있습니다. 1호선에 있는 절연구간이 별거 아닌거 같지만, 그걸 위해서 전동차에는 두 종류의 전원에 대응 가능한 전장품과 회로가 설치되어야 하고, 이 절연구간에 쓰일 수 있는 내구성 있는 전차선 접속 설비, 그리고 조작미스를 막기 위한 신호와 보안장치와 승무원 훈련, 사고시의 대처체계 등 그만큼 투자와 노력이 따르게 됩니다. 더욱이 교류전철화는 1950년대에 갓 개발된 신기술로 1960년대 초반까지는 기술 이전을 꺼리던 품목 중 하나여서, 일본도 개발 샘플 차원에서 프랑스에서 교류기관차를 소량 도입하려다 퇴짜를 맞아 독자개발을 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안그래도 기술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확신이 들지 않는 신기술에 기대느니, 이미 망이 제법 깔려있는 직류철도에 의존하는 건 어쩔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1960년대의 설비 수준에서 극적인 발전이 없는 3000V기반의 단선 직류전철화가 대대적으로 단행되어버리면서, 실리콘 정류기 등으로 촉발된 교류전철화 등 세계적인 기술동향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철도가 뻗어나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후 냉전 해체와 더불어 경제난이 가속화되면서 노후화된 단선전철이 지배하는 네트워크가 그대로 남겨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정책 실패라면 정책 실패겠지만 이게 또 단순히 지식과 지혜가 모자라거나 노오력이 부족해서 생긴 실패라기 보다는, 이래저래 생긴 실패에 타이밍과 운빨까지 안따라주면서 제대로 꼬여서 일이 커진 그런 케이스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