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호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차량으로, 전지지령식 제동에 답면제동이 아닌 디스크 제동을 채택하는 등 당시 객차와 격이 다른 고성능 객차라 할 수 있었습니다. 설계 당초부터 150km/h운전을 전제로 설계가 나와서 이후 도입된 무궁화호 이상 차량의 사양을 확정지었다 할겁니다. 다만 견인기에 대해서는 후대의 입장에서는 흑역사가 되어버린 안습함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 언급으로 보면 이 견인기가 그냥 신간선 모양만 낸건 아닌게 보입니다. 일단 언급되는 세 꼭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차축당 중량을 24톤에서 17톤으로 줄였다는 점입니다. 도데체 뭔 흑마술을 부렸기에 144톤짜리에서 40톤을 날렸는지 모르겠지만, 개업 1개월 전의 기사에서 실제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을 이야기했을 리는 없을겁니다. 실은 6300호대라 불리는, 당시 7000호대 디젤기관차가 90톤 축중 기준으로 10량 도입이 된 바 있기도 하니, 이 관광호 전용 견인기로 작정하고 도입을 했던건 확실합니다.
전두부 디자인을 신간선형으로 한 것에 대해서도 이점에서 한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단순히 외형만 맞춘게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기술진의 지원 하에서 공력설계의 방편으로 도입된게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7000호대는 도입 초기에 150km/h운전이 가능한, 실제로 표정속도 목표를 77km/h에서 93km/h까지 향상시키는 걸 목표로 했는지라 전두부의 공력설계 개선 필요성이 분명히 존재했을겁니다. 8200호대나 이후의 PP-DHC, 그리고 지금의 누리로나 ITX새마을도 모두 유선형 디자인을 따고 있는것도 그 탓이고 말입니다. 여기서 당시 한국의 설계기술은 워낙 후진적이고, 별도 사양으로 미국에 설계의뢰를 할 여력도 별달리 없다보니, 그나마 검증된 공력설계 외형인 일본의 신간선 것을 그대로 모사한게 아닌가 추정이 듭니다. 뭐, 디자인적으로 그럴싸해 보인다는 점도 어필이 컸을거고 말입니다.
다만 실제로 7000호대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건 확실한데, 일단은 ATS가 도입초기엔 신뢰성이 좋지 못해서 사고를 초래한 적도 있고(제천역 충돌사고), 또 축중을 경감한단 이야기는 동시에 충분한 구동력을 확보할 수 없어 공전을 심하게 일으킨다는 문제도 있었을거라 아무리 천하의 디젤전기기관차라 하더라도 8량 이상을 견인해야 하는 조건 하에서는 한계가 명확했을거라 봅니다. 제동거리 또한 동시에 길어지는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이 되고 말입니다. 여기에 당시의 7000호대는 2000마력 짜리로 출력 또한 충분치 못하기도 했을겁니다. 그외에 어설픈 개조로 중량배분의 문제가 있거나, 차체 및 전면 강도 부족 문제도 있어서 사고 폐차로 추정되는 조기폐차가 몇건 발생한 걸로 추정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서 6300호대로 개번당하고, 7100호대 이후의 3000마력급 특대형들이 들어오면서 이 애매한 여객전용기는 용처가 모호해졌고, 그래서 7500호대들 처럼 화물용도로 전용하면서 기어비를 낮춰 105km/h 최고속도로 조정되어 이래저래 천덕꾸러기처럼 쓰이다 도태가 된걸로 추정됩니다. 이 즈음에서 전두부 디자인이 통상적인 기관차 형태로 환원이 된게 아닌가 추정이 되고 말입니다. 이런 실패를 열심히 기록해 둘 이유가 없다보니, 최초운행 시점에는 사진이 여럿 남아있지만 어느시점엔가 사진이 하나도 안남게 된거고.
다만, 축중을 줄여서 고속운전시의 선로부담을 줄이는 개념은 이후 PP-DHC에 발전 계승되어서 4축 전후동력형으로 구현을 달성하게 되고, 또 동시에 EMD의 기술지원으로 특대형을 150km/h운전으로 돌리게 된걸 보면 저때의 실패가 완전히 사장되지는 않고 이런저런 개선점을 찾는데 기여는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70년대는 철도에게 그리 좋은 시절이 못되던 때고, 오일쇼크라는 대형 경제사건이 있어서 전철화를 모색하다가 다시 포기하는 등의 우왕좌왕이 반복되던 시대였지만, 그 때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80년대의 150km/h운전 개시(물론 표준선구에 한정이지만)를 달성할 수 있게 된거라 할겁니다.
P.S.:
여담이지만, 관광호 객차를 도입하면서 왜 이런 호화객차를 도입하냐고 조야에서 난타를 당했던 흔적이 보입니다. 실제로도 당시에 매우 귀중했던 외화를 동원해서 당시 6000호대 디젤기관차의 도입단가의 1/3 정도에 달하는 량당 8만불 이상의 외화를 들여 도입을 한건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의 객차와 디젤기관차의 가격비례가 1/6~7정도이니 꽤 단가가 후한건 확실합니다. 여기서 좀 의심이 드는건 역시 정치자금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은데... 이건 뭐 추정의 영역입니다. 다만, 그렇게 들인 객차 자체는 그나마 외화를 가장 확실하게 벌 수 있는 관광 쪽으로 충당을 해서 이미지 개선을 이룬감이 있고, 이후 이 차량의 사양을 배워서 고속운전용 객차들을 국산화 생산했으니 그나마 이 수상쩍은 사업을 잘 활용하긴 했다 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