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경인축을 따라 도시를 개발하게 된 배경은 국제정세의 급변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자초했던 것이었고. 괴뢰국가로 만주국을 설립하고, 공식 비공식으로 끊임없이 중국과 무력충돌을 일으키면서 야금야금 세력을 넓히다가 결국 중일전쟁으로 비화가 됩니다. 물론 군수품 무역때문에 둘 모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어물대서 사태니 사변이니 하는 용어를 썼지만, 뭐 지금에 와서는 전쟁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는 합니다.
이 전쟁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온것이 경인축선의 개발이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한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경인권 전체, 즉 현재의 부천, 부평 일대의 개발이 본궤도에 오른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부평 일대에 병기창이 들어선 것이나, 인천일대의 공장들이 입지하게 된 것도 이때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경인축선의 개발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인천부를 중심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본토의 영향을 받아서 대도시를 지탱하기 위한 경인선의 전철화가 주장된 바 있기는 하지만, 정작 본격적으로 전철화가 추진되기 시작한건 바로 중일전쟁이 코앞에 닥쳐왔던 1937년 6월의 철도국 전기과 설치였고, 그 배경은 이 거시적인 정세에 있다 할겁니다.
이 1937년부터 1945년 까지의 개발은 전시체제 하에서 병참산업을 일으키고 이를 수송하는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물론 이미 1920년대부터 총독부의 정책이 아주 무식하게 쥐어짜는 정책 일변도에서 점차 어느정도의 경제개발과 온건한 문화사회정책을 갖춘, 당근과 채찍을 같이 쓰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서 도시화와 인구증가가 촉진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동시에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민수부문의 억제가 강해졌고, 개중에서 전시체제에 기여할 만한 사업들 위주로 인프라 투자가 집약되게 됩니다. 이 대표적인 케이스 삼척철도나 경춘철도를 들 수 있습니다. 전자는 일본 내의 화력발전 및 시멘트 생산을 위한 무연탄 반출의 목적에서, 후자는 북한강으로부터의 전력 개발을 위해서 물자통제가 압박해 오는 와중에서도 차근차근 건설이 됩니다. 뭐, 지하자원이나 공업면에서 이미 일정지분을 가진 북한지역이야 말할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철도망은 전쟁 수행에 영양가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추진이 갈리는게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병참이나 군수공업에 직접 관련이 있는 철도들에 대해서는 물가고와 물자난 속에서도 꽤나 적극적으로 지원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철도건설의 핵심자재라 할만한 철강의 수급은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중앙정부가 직접 배분을 컨트롤하게 되었기에 이 시점에서 정부의 의사에 합치하지 않는 철도는 레일 수급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추진력이라는 것도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사실상 무력화되다시피 합니다. 조선 내에서 자급되는 자재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본토로부터의 물자가 없으면 건설 추진 자체가 굉장히 해골복잡해지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무한정 확장되면서 민수수송을 위한 선박 수급이 꼬이기 시작하고 반대로 철도로의 수송 전가가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건설은 무슨 당장 보선에 충당할 자재도 답이 없는 상황이 됩니다. 뭐 그래도 아예 0에 수렴하는 상황까진 가지 않다 보니 어찌되었든 이시기에도 노선 건설은 추진되고 이래저래 사업은 돌아가지만, 1943년 이후부터는 이것도 거의 불가능해져서, 결국 나온것이 금속류회수령에 근거한 철도자재의 공출이었습니다. 1944년에 이루어진 일인데, 이렇게 회수된 자재를 전쟁수행에 필요한 항만, 탄광, 공장 인입선, 경의·경부선 복선화, 수색, 평앙, 부산 등지에 조차장 신규설치 등에 충당했습니다.
즉, 전시체제가 돌아가는 한에는 철도망 자체가 거시적 국토계획이나 도시화에 따라가는 그런 한가한 일은 있을수가 없다고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닐겁니다. 물론, 전시체제의 군수공업들 때문에 통근량이 급증하고, 그 덕에 철도여객수송이 급팽창한 측면도 없잖아 있지만, 일단 1941년 이후에는 불요불급한 여행은 자제, 4km정도는 걸어다니자 등의 지금 봐도 찰진 개드립이 정책으로 돌아가는 그런 시대였고, 군수수송 증가 때문에 기관차가 모자라서 여객열차를 삭감하고, 그것도 모자라 말년에는 아예 특급, 급행열차가 없어지는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왜 그런 망을 안갖췄냐 나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뭔 한가해 빠진 비국민스러운 이야기냐 라고 생각했을겁니다.
뭐 일제시대의 철도망 구상의 골격을 이루는 1927년의 조선철도 12년 계획의 노선망을 보면 일본인 입식민을 위한거긴 해도 일제의 국토 및 경제 개발의 의욕이 없는 건 아니기는 하지만, 사실 그 큰 틀의 그림에서는 일본제국 육군 참모부의 필요가 우선시된 계획이기도 했었습니다. 애초에 일본 국내의 지역 요망노선들을 하고자 하는 정치인들과 예산투쟁을 해서 저걸 입안시킨 것 부터가 국가전략이라는 목적 없이는 택도 없는 이야기일거였고, 실제 집행에서도 북한지역의 간선들, 이른바 만선 연락 노선들이 1930년대에 어떻게든 완공되었던거에 비해서 남한지역의 신규 간선들은 해방시점까지도 미완성 구간이 남아있었으니 뭐 각론은 몰라도 총론에서 병참 우선을 뒤집을 이야기는 없다고 봐도 될겁니다.
경부축의 중시라는 문제 역시 일제시대의 병참체계나 행정 시스템을 생각하면 변할수가 없는 사안인데, 당시 일본의 세력권 내를 달리는 철도의 중추는 도카이도선-산요선-부관연락선-경부선-경의선-남만주본선으로 이어지는 축이었습니다. 이 국제간선의 용량문제 때문에 경부선과 경의선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와중에 복선화가 진척되고, 또 군부의 의향이 담긴 본토의 탄환열차 구상에 맞춰서 가능한 한 최대한의 선형개량을 반영해 넣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중앙선(당시의 경경선) 같은 철도가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다 1936년에 부랴부랴 착공된 것도 사실상 외길이고 경기도 일대에서는 해안 및 대하천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성이 있어서 그 백업으로 계획이 된거였습니다. 이 구조가 해방 이후에도 고착화된 것이 경부축 집중문제인 셈이어서 후대 위정자의 잘못이네 아니네로 말하기는 간단한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만약 중일전쟁으로의 진척이 없어서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거나 2차대전의 후과로서 신생독립국이 되었다면 아마 중앙선을 위시해서 철도망의 1/3정도는 없었던 일이 되었을거고, 만약 1960년대 후반까지 일제 치하였다면 본토의 경영합리화 논란에 덩달아 여러 자질구레한 선들이 잘려나가기 시작했을겁니다. 뭐 1944년에 선로공출 대상이 되었던 노선들이 1945년을 넘겼더라도 아마 1960년대에는 다들 적자선으로 칼부림의 대상이 되었을거라, 그야말로 명예로운 폐선을 당했다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