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었지만 이걸로 국내 차량제작사 중 성신RST만 제외하면 3개사가 모두 통근형 전동차를 제작, 공급하는 실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은 좀 더 일찍 그렇게 되었지만, 국철까지 3사 체제가 된건 여러모로 시장정책의 큰 변화라 할 겁니다.
아는 분은 다 아는 거지만, 철도청 말기의 저가수주가 워낙 문제가 되었고, 또한 IMF이후의 과잉설비 정리와 규모의 경제 확보라는 이슈때문에 빅딜 정책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당시 차량제작 3사인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 3사를 합쳐 지금의 현대로템을 구성하게 된 바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이 합병에 들어가지 못한 중소회사가 있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객차 및 동력차를 단 하나의 단일기업이 받아가는 체제를 거의 10여년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뭐 철도구조개혁을 내걸고 민영화라 쓰고 산업의 축소를 전망하던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정세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해서 대외 경쟁력을 갖추면서 서서히 축소되는 국철차 부문을 줄여나가고, 지하철이나 경전철로 산업 파션을 대체하 가고자 하던 정책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기는 할겁니다. 지금보면 뭔 뜬금없는 개소리냐 하겠지마는, 철도의 사양산업론을 80년대 내내 우려먹었던걸 생각하면 그런 선입견을 당시의 정책결정자들이 안가지고 있을거 같지는 않았을거라. 실질적으로 합병된 대우나 한진의 캐파를 전부 날리고 오로지 창원 라인만 유지한데다, 당시 90년대의 결정사안이던 청리 공장계획도 없애버릴 정도였으니, 대외적으로 말만 안했지 그런 배경이 있었을거라 봅니다. 과잉캐파는 덤핑압력만 키워서 철도청만 좋은 일을 한다고 보기도 했을거고.
그러나, 영업키로가 1999년에 3,118.6km이던게 이젠 철도공사 단독으로 3,918km.에 도달한데다 SR과 공항철도 등을 합치면 4,000km를 돌파했고, 인킬로는 철도공사 단독으로 280억 인km에서 400억 인km까지 증가해서, 사업성으로는 몰라도 철도수송 자체는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했습니다. 철도건설 투자가 계속 이루어졌고, 국가 시책이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자가용 만큼이나 철도를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지자체의 도시철도나 교통 투자가 상승작용을 해 온 결과라 할겁니다.
덕분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교체수요 만으로도 1개 회사의 캐파를 넘겨서 여러 업체가 먹고 살 정도의 물량이 나오고 있다 할겁니다. 철도공사의 경우 2017년 말 기준으로도 20년 이상의 노후차가 700량 이상, 저항차 잔존 수량은 136량 정도였고, 서울교통공사의 경우는 무려 1,929량으로 도데체 이걸 어떻게 교체할지 감도 안잡히는 막대한 숫자가 물려있습니다. 여기에 간선차량도 객차는 400량 이상, 디젤기관차는 90량 이상이 밀려있으니 이걸 연장사용으로 소요를 조정해서 소요량을 평준화 해도 교체수요만으로 매년 500량 정도는 계속 제작이 돌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와 있습니다. 여기에 신규노선이나 증차 소요분까지 감안하면 10년 정도는 차량제작 소요량은 꾸준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춘추전국시대 처럼 제조사가 여럿 굴러간다는 건 개인적으론 일장일단은 있다고 봅니다. 우선 가장 큰 장점은 사업체가 여럿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기술면에서의 다양성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서비스 경쟁같이 뜬구름 잡는 비교경쟁 보다는 좀 더 명확한 제품 스펙, 메커니즘, 유지보수성, 비용 등에서 비교를 해볼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물론, 한국의 철도차량 시장은 어디까지나 발주자 주도성이 강해서 유럽처럼 제조사가 완제품 모델을 개발해 제안하는 수준에 비할바는 못되고, 부품 레벨에서도 에이전시의 차이일 뿐 수입부품들이 고만고만한 경우가 많아서 예전의 선진국들 처럼 상당한 차별성을 제공하긴 어렵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여러 업체가 다양한 제안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상호간의 기술, 사업모델의 발전이나 철도회사의 운영의 질에 기여할 수 있을거라 봅니다. 동호인으로서도 다양한 디자인이나 모델이 다니는 철도가 되면 볼 거리가 늘어나고 효율화의 단조로움도 좀 해소가 되긴 할거라 봅니다. 뭐 이건 당장에 도색 편의 위주, 유지보수 편의 위주로 일하는 철도회사들의 마인드도 극복해야 합니다마는.
다만, 문제가 되는건 모델이 다지화 되면서 그야말로 유지보수의 파편화가 우려된다 할겁니다. 발주 규격에서는 여러 인터페이스들을 서로 맞추도록 나가긴 하겠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호환성이 담보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나올거고, 이렇게 파편화된 부품이나 정비방식들이 누적되면서 유지보수의 효율성을 갉아먹는 문제가 나오기는 할겁니다. 물론 당장에 제어방식으로 저항차, 초퍼차, 인버터차가 따로 놀고, 인버터차도 소자방식 등에 따라 연식별로 차가 달라지는 문제들이 있는 상황이긴 한데, 여기에 제조사까지 파편화되는 상황은 효율성의 문제까지 이어질 가망이 높습니다.
물론, 이런 효율성을 너무 강조하다가 거의 20년 넘게 같은 모델을 주구줄창 사들였던 일본의 신간선 0계 차량 케이스처럼 시대에 뒤쳐진 기술을 계속 굴려먹는 문제가 생기기는 합니다. 또, 모델의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결함이나 개량개소를 제대로 손보지 않고 들어가는 경우의 위험도 존재할 겁니다. 그렇지만 제조사 파편화는 이것 이상의 리스크가 있는 부분인 만큼, 여기에 대한 대책 내지는 대안이 좀 검토는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파편화를 막겠다고 경쟁제한적인 정책을 가져가는 건 요즘엔 거의 불가능한 문제도 있을거라 봅니다. 결국 교체분 차량발주를 단년도에 개별 입찰로 굴리기 보다는 다년도에 걸쳐서 노선당 한두 업체로부터 꾸준히 공급을 받고, 모델 변경을 어느정도 억제하는 그런 방식을 제도화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뭐 그 전에 참담한 사업수지를 가지는 철도운영 부문의 개선이 필요는 하긴 할겁니다. 물론 정책적으로 저운임을 때려넣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마른수건을 비틀어도 적자는 적자일 수 밖에 없는데, 적어도 보조 정책을 좀 온정적으로 가져가던가, 아니면 저운임 기조를 좀 포기를 하던가, 그도저도 아니면 임대사업이나 개발사업이라도 좀 밀어줘서 누적적자나 금융부채를 좀 떨게라도 하던가 뭐라도 뽑기는 해야할겁니다. 차량을 자급할 수 있어야 좀 더 융통성이 있는 발주체제를 가지든 말든 하는데, 지금은 매년 예산사정 따라 널뛰기 하는 보조금 눈치를 보면서 굴러가야 하니 혁신적인 차량이고 비용효율이고 산업 육성이고 제끼고 먹고사니즘 발주를 하게 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