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도 기사에 전철화 계획이 언급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배경을 병참기지화에 따라 산업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여기에 대응하여 철도국은 속도향상과 함께 수도권의 전철화 구상을 마련했다고 언급을 합니다.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에 전기과를 신설하고 본토 기술자들을 초빙해 왔다고 하는데, 단순히 전기 시설물의 증가만 본게 아니라 전철화를 전제로 깔고 접근을 했던게 여기서도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구상의 원문을 알기는 어렵지만, 기사에서 다루는 1차 계획은 경인선 39.9킬로미터의 전철화 계획이었습니다. 직류 3천볼트를 사용한 급행전차를 운행하는 것이 그 골자로, 복선화와 동시에 차량 20대를 제작, 2량 연결 운전을 전제로 총 운전시간 40분, 배차간격은 매 20분 간격 운전을 하겠다고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광역전철에 비하면 초라한 볼륨이기는 하지만, 저당시의 인구규모는 지금에 비할바가 아닌데다, 당시 전철로 통근 통학을 하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저정도로도 충분히 납득가능한 공급은 되었을거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당시의 경인선은 경부선 등지에 쓰이는 대형 기관차가 다니지 못하는 비교적 시설이 빈약한 선구였던지라 전동차 투입으로 가닥을 잡는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건설기간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로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뭐 실제 역사에서는 아시다시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복선 노반 공사 정도가 어느정도 진척되었다던 말은 있었습니다. 이거보다는 당장에 전쟁에 필요한 군수수송용 인입선 같은게 더 급했고, 대미개전 이후에는 아예 자재 확보가 불가능했으니 더 진행될 건덕지도 없었을거고 말입니다.
이외에 잘 알려진진 복계-고산간의 전철화 사정도 언급이 되는데, 당시 해당 구간 약 53.9km 구간은 탱크기가 뒤에 붙어 겨우 운행할 정도의 험준한 구배구간이어서 암에 비유될 정도로 심각한 수송정체 구간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건 전쟁 수행 문제에도 꽤 뜨거운 이슈였는지 전쟁기간 중에도 계속 진행되어 실행된 바 있습니다. 해방후에는 북한이 인수해서는 철거 유용했다고 합니다마는.
그리고 2차 계획에 언급되는 노선들은 꽤 쟁쟁한데, 경성(서울)에서 경의선 토성에 이르는 82.5km, 경성에서 수원까지 41.7km, 그리고 경성에서 철원까지 101.3km 구간을 전철화 하여 급행전차를 운행하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철도국 직영으로 경성역에서 남대문통 조선은행까지의 1km 구간에 지하철을 설치해서 급행전차를 넣겠다는 구상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토성역과 철원역은 꽤 의미심장한 역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토성역, 지금의 개풍역의 경우엔 개성을 지나 위치한 역으로 황해도 각지로 향하는 협궤사철선의 접속역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즉, 경의선축과 황해도 협궤망의 트래픽과 접속이 가능한 거점까지의 접속을 확보하는 의도를 가진 노선 구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철원쪽의 경우도 비슷해서, 사실 이쪽은 도시화 면에서는 의미가 없는 축이지만, 금강산전철선이 접속하고 있어서 전철망의 접속이라는 차원에서 접근이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겁니다. 뭐, 당장에 수원까지의 노선구상도 일단 경기남부의 거점도시인데다, 당시 건설이 완료된 수인선, 수려선의 접속을 배려한 것이었을거라 생각이 되고 말입니다.
한편으로 지하철 쪽은 철도국이 아닌 경춘철도에서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었는데, 1939년 5월 30일에 제기정에서 동대문까지의 약 2km구간에 대해 사업허가를 신청했고, 그해 12월에 격론 끝에 허가가 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노선은 어디까지나 1기 노선으로 장래 경유지는 당시 경춘선의 기점인 현 제기동의 성동역에서부터 동대문까지지만, 이후 예정선으로 화신앞(현 종각역)에서 미츠코시앞(현재의 신세계 명동점)을 거쳐 경성역에 이르는 노선축이었습니다. 현재 노선에서 시청앞 경유가 아닌, 종각즈음에서 크게 노선을 꺾어 남대문로 축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구상인데, 위의 철도국 구상은 이거와 연계하되, 사업성이 확보됨직한 남대문통 까지는 국선 구간으로 하려는 구상을 깔고 있던걸로 보입니다.
사실 경춘철도 주식회사의 야망은 처음 노선 건설 시부터 꽤나 컸는데, 철도국은 초기에 성동~춘천간의 건설신청을 접수했을 때 성동 기점이 아닌 청량리를 기점으로 할것을 강력히 권고했었다고 합니다. 건설비 부담을 덜 수 있는데다, 국철과의 연계를 우선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안이고, 해방 이후 계통정리를 하면서 청량리를 기점으로 정리가 된바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춘철도의 경영진은 노선의 전체 구성상 한사코 성동 기점을 고집했고, 전시체제로 인한 자재확보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일본 본토에 가서 적극적으로 주장을 관철시키기까지 해서 전구간을 완공시키기까지 했었습니다. 보통 철도국이 사철에 행정지도를 해서 안을 따르게 하는데, 경춘철도는 이례적으로 이를 뒤집어냈다는 점에선 아마도 경성부의 도시문제 해결 의도가 배경에 있긴 했겠지만 굉장히 예외성이 많이 보인달까.
결과적으로는 1940년 1월에 미일통상항해조약이 폐지되어 양국간의 무역이 사실상 중단되기 시작하고, 10월에는 미국의 대일 고철 수출이 중지되는 등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재와 노동력의 수급이 한층 더 막장화되었기 때문에, 12월에 공사인가가 나가긴 했어도 결국 한삽도 뜨지 못한채 폐안이 되어버린 걸로 보입니다. 다만 이 계획 자체는 당대에 어느정도 알려져 있던 사안이었던 모양인지, 해방후에도 일제시대가 계속되었으면 50년대엔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을거란 이야기를 하는 배경이 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의 1호선 보다는 이쪽이 청량리 접속이 없다는 점만 빼면 좀 더 그럴듯한 노선계획이 되긴 했을거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마는 뭐 당대에 설명이 안될만한 이유가 뭔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은게 이 즈음의 계획인데, 지금에 와서야 큰 의미를 두긴 그렇지만 한번 정도는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긴 하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