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정도 전에 나왔는데 다른 책을 찾다 우연찮게 발견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자주 언급했었던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의 사후처리 과정을 서술한 논픽션인데, 거의 10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정리된 글인 만큼 사고 자체의 분석보다 왜 그렇게 분석이 되고 그 이후의 사후처리가 어떻게 전개가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충격이나 변화 같은 요소보다는 그 발생시점에서 유가족과 사고 가해자인 JR서일본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해 왔는가에 집중한 점이 특히 읽을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JR출범 이후부터는 일본철도에서는 사고조사에 있어서 책임의 추궁보다 원인의 규명을 우선시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편인데, 이 원칙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책에서도 이 원칙이 안지켜지는 조직문화와 경영체제가 어떤 사회적 재난을 초래하였는가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민영화 이후 구 국철의 파탄지경이던 노사관계와 노무관리의 반동으로 상당히 엄격한 정책을 추구하던 JR서일본의 문화가 어떤 연쇄를 일으켜 100명 넘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고로 이어졌는가는 당시 사고 직후의 보도나 사고조사 보고서에서도 언급되지만, 여기에서는 좀 더 구체성있게 그리고 각 관계자들의 견해가 더해져서 이게 왜 문제였는가를 풀어내는 점이 인상적이라 할겁니다. 흔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을 갈아넣어 굴리는" 일본 철도의 현상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고자 한다면 일독할 가치가 있다 할겁니다.
또한, 사고를 대하는 당국의 태도 문제에 대해서도 이래저래 다뤄볼 부분들이 많이 보입니다. 구 국철 시절의 노사대립에서 인사문제, 즉 인력충원이나 적절한 인선같은 추상적인 문제로만 천착하던 노조의 관행이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고 선을 긋는 유족단체라던가, "나는 틀리지 않았다" 마인드로 법적 책임의 최소화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주요 경영진이나 여기에 동조하는 각급 직원들의 행태 문제 같은 점은 이래저래 우리 사회에서도 잘 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또 사고대책이 어떻게 형해화 되어가는가가 말미에서 조금씩 다뤄지는 점도 그렇고. 이 책에서 언급되는 안전관련한 좀 엇나간 행태나 심리들은 우리나라의 실무 레벨에서 종종 목도되는 그런 것들이 보이는데, 철도 안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해 둔다면 이런 엇나감을 좀 줄여볼 수 있는 방향성을 좀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번역이나 문장은 상당히 잘 된 편이고, 원문은 직접 보진 않았지만 꽤 잘 읽히는 문장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좀 관심을 뒀던 주제라는 점도 있지만 400페이지 여의 책 치고는 꽤나 부담없이 읽혀지는 편이었습니다. 번역에서 조금 아쉽게 옮겨진 용어들이 몇개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이 맥락을 전부 살리기가 간단치 않아서, 또 너무 중언부언이 될거같아서 정리를 했던게 아닌가 생각은 되지만 좀 풀어두었다면 하는 감은 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 좀 속어 비슷하게 쓰이는 두 키워드가 좀 아쉽게 번역된게 있는데, 하는 "이데 그룹"이라는 용어로 옮긴, "이데 상회"라는 비유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말 그대로 구멍가게 분위기의 상회 뉘앙스가 나서 일부러 그룹이라는 표현을 쓴거같지만, 저 표현이 나온 이유가 1인이 멋대로 이리휘두르고 저리 휘둘러대는 그런 상황을 속된말로 ㅈ소기업 경영자 마인드라고 비판하기 위해 쓰인거라서... 상회나 상사 정도로 다뤄버리면 대충 비슷한 뉘앙스가 전달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은 듭니다. 8, 90년대 일본 기업물 극화 같은데서 종종 묘사되는 도쿄의 명문학교에서 럭비부 경력을 가진 종합상사 고위임원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느낌으로 쓴 용어일거라.
그리고 중간에 둥글게 한다는, 어떤 사안을 무마한다는 속어 표현이 나오는데... 이건 일본 국철 관련 책을 몇 개 읽어보면 절대 안볼 수 없는 표현들 중 하나인 "마루니 스루"를 어떻게 옮길까 고민한 끝에 나온 그런 표현일거라 생각됩니다. 뉘앙스를 살려서 옮기기가 정말 어려운 용어인데, 직역하면 "0으로 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좀 카더라 어원이기는 하지만, 뭔가 사고나 고장으로 열차가 지연될때 이걸로 문책이 잡히게 되니 최대한 사안을 덮고 무마시켜서(이른바 회복운전이든, 역에서 꼼수를 부리든) 누적지연시간을 0으로 만든다는 그런 의미로 쓰던게, 어떤 사안을 없던일로 만든다, 덮어서 무마시킨다 그런 뉘앙스의 속어로 국철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던가. 뉘앙스를 살리기가 참 어려운 속어인지라 다른 대안이 없긴 합니다만, 약간은 맛이 애매한 번역이기는 합니다.
일단 내용의 본질에서는 아주 깊게 관련된 건 아니지만, 일본JR의 노조 관계가 JR화 이후 워낙 중구난방, JR총련이나 JR연합, 여기에 국노 계열이나 신좌파 관련 노조 등등 워낙 콩가루 비슷하게 꼬여있고, 이 과정에서 이합집산이나 조직명칭이나 구성을 가리는 명명 등도 꽤 있어놔서 이거 정리만 해도 책 한권 정도쯤은 나오는 그런 사안이기는 합니다. 국철의 국노, 동노, 철노의 3조직을 알고 번역을 맞춰보려고 하다가 좀 흐지부지 된 감이 있는데... 이건 좀 파보려는 사람이 직접 파봐야 할 영역이긴 하지만, 약간 용어 매칭을 잘 해두는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