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은 늘 경제성이 모자란다, 사업성이 없다 라고 토가 달리던 철도고, 정말 장기구상에는 늘 들어가면서 실제 실현은 제대로 되지 않던 베이퍼웨어같은 철도였습니다. 95년 폐지 시점에는 민자사업으로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무산되고, 재정사업으로 하면서도 민원과 예산문제 등으로 줄줄히 밀리기 일쑤여서 착수하고서도 20년을 넘게 장기순연했다는 점에서 참 눈물나는 철도라 할만 합니다. 그런데, 과거 왜정 시절에도 이건 별로 다르지가 않았었습니다.
수인선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1927년에 책정된 '조선철도 12년 계획' 이라는 투자계획입니다. 정작 철도국 사업선으로는 채용되지 못했지만 인천상의와 인천부가 연대해서 "인천에서 수원을 경유하여 동해안 강릉에 이르는 횡단철도"라는 요망선으로 제안된 바 있습니다. 이 즈음에는 그래서 일본 본토와 비슷하게 기성회니 촉진회니 하면서 대개 일본인으로 구성된 지방지주나 사업가들, 그리고 관공서 사람들이 이래저래 활동을 했었는데, 수인선은 당시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었는지 수인철도주식회사라는 사철로 실제 법인 발기와 사업허가신청까지 가기는 했었습니다.
문제는 이 수인철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자본 모집이 매우 불량한데다, 경인선과 경쟁관계로 굴러가야 해서 당시 철도국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경쟁선이었기에 자세가 굉장히 소극적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여하간 수인철도가 제대로 안돌아가자, 1926년부터 설립운동을 벌여 1928년 겨우 법인설립을 달성한 경동철도를 통해서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던걸로 보입니다. 이 시점에서 수인선은 경부선과의 연계에 초점을 맞춘 표준궤 철도가 아닌, 경동철도의 수려선과 연계하는 협궤 철도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사실, 경동철도는 사철치고는 굉장히 늦게 발족이 되었고, 덕분에 분위기 좋던 1920년대 초반을 다 넘겨서 자본모집에 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그 덕분에 결국 자본이 모자라서 1928년 착수를 하면서 표준궤 대신 협궤로 부설을 결정했는데, 여기에 붙어서 부설을 하게 되 수인선도 직결운전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되어 762mm의 협궤로 결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려선 쪽은 워낙에 건설의 어려움이 심해서, 1970년대 철도청 문헌에서 언급된 바로는 최소곡선반경 R=160, 최급구배 30퍼밀에 달하는 그야말로 막장의 냄새가 풀풀나는 그런 철도였습니다. 영업은 그나마 쌀 반출이 호조였고, 어찌되었던 교통자체가 빈약하던 이천, 여주 일대에 협궤나마 철도가 들어간 덕에 그런대로 되긴 했지만, 썩 훌륭하진 못했는지 수인선은 이후 추가로 자본모집을 1935년에 해서 겨우 착수, 1937년에 완공을 봅니다.
수인선의 개통은 경동철도에 있어서는 꽤 긴요했던 모양인데, 일단 철도국선인 경부선 수원역에서 환적 부담 없이 인천항을 통해 쌀을 반출하고, 비료나 시멘트같은 자재를 반입할 수 있게 되어서 운임경쟁력이나 수송효율을 높힐 수 있었던 모양이고, 또한 인천 일대의 염전으로부터 소금을 수송하면서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점 덕에 인천측 종점인 인천항역을 부랴부랴 확장하고 인입철도를 더 까는 등의 활동이 개통 직후부터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덕에 이런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중에 일본 본토에서는 이른바 대합동이라 불리는 정부의 철도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잘한 사철회사들을 정리해서 큰 사철회사나 아예 국철에 편입시켜서 수송효율성을 확보하고자 추진된 정책인데, 경동철도 역시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당시 사실상의 총독부의 제2철도 격인 사철회사 조선철도 주식회사에 합병되어버리게 됩니다. 이 시기의 구조조정은 기록이 소략하고, 신문등으로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는 것들이어서 종종 누락되는데, 1942년에 이 정리가 단행되어서 경동철도가 아닌 조선철도 수인선, 수려선이 되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철도 외에 2개 사철이 군정청 명령으로 국철에 수용 편입되었는데, 이때 수인선도 같이 국철에 편입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남북 분단이 이루어지면서 수인선, 수려선은 황해도의 토해선과 함께 남한측에 남은 협궤선이 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토해선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버리면서 사실상 남한 내의 유일한 협궤철도로 남겨지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삼척에 협궤를 쓰는 산림철도가 남아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철도선으로는 취급하지 않았던 모양인데다 그나마도 1959년 사라호 태풍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폐지된지라 1960년대 이후에는 이견없이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수인선의 종말은 자동차 교통의 발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데, 수인산업도로가 70년대 확충되면서 사실상 수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될겁니다. 수려선이 1972년에 폐지되고, 같은 해에 모두의 인천항 인입철도 부설 계획이 나오면서, 표준궤 개궤 이후의 수인선은 그야말로 그 사명을 다해 폐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나마 연선의 염전으로부터 소금 수송이 근근히 남아있었고, 또 경기도 내에서는 꽤나 격오지 취급을 받던 지역에 놓였다 보니 일단은 개궤와 동시에 폐지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보이지 않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관행, 그러니까 철도재정이 늘 압박을 받기 때문에 최대한 확보된 토지 등을 활용하는 걸 생각하면 양 선을 병행 운전하는 건 계획의 이야기고 부설단계에서는 없었던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수인선의 존재의의를 갉아먹던 병행선인 경인선이 수인선을 이때 살려낸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저 인입철도 부설계획은 실은 전혀 실행되지 못하고 사실상 보류가 되었고, 이를 대체해서 부설된 것이 인천에서 학익 인근까지 뻗은 표준궤 인입철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천항 인입선은 물론이고, 학익동 일대의 특정한 공단으로부터 물자 수송까지 인천역 경유로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수인선은 일단 개궤로 인한 폐선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인천항(남인천)에서 송도까지의 철도를 상실하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 좀 더 연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인천 시내까지 갈 수 없게된 결과는 여객의 이탈을 초래했고, 이후 인천 시가지의 확장, 남동공단과 반월공단 등 안산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서 수인선은 흡사 인디언들 처럼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송도에서 남동까지는 남동 신시가지 확장을 이유로, 이후 공단 조성을 이유로 계속해서 소래, 원곡(현재의 안산) 까지 노선이 단축되다가, 안산선 전철 개통 이후에는 그나마도 병행선이 되어서 한대앞~수원까지로 단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전철 환승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운임 정도밖에 없는, 하루 3왕복짜리 망한 노선이 되었고, 차량의 노후화를 더 견디다 못한 끝에 1994년 연말 부로 폐지가 되게 됩니다.
복선전철화 완공까지 민간투자사업 추진과 좌절, 화물기능의 상실, 지하화, 시공사 부도 등등 협궤 이후의 수인선도 굉장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는데, 그 최초의 태생부터가 국철 병행선으로 애매한 위치의 노선을 지역에서 자본을 탈탈 털어 겨우 개통시킨 사철이었다 보니, 그 타고난 운이 그런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이제는 완전한 복선전철 광역철도가 되었으니 별 탈 없이 융성하기를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