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실체적인 진실은 좀 다르지 않나 생각되는데, 철도를 거기로 놓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거기를 지나간 게 아닌가 라고 추정이 됩니다. 일단, 안동역은 중앙선 개통보다 더 이전인 1931년에 조선철도 경북선이라는 사철로 개업을 했습니다. 지금의 경북선 중 2차대전 당시 철거된 예천~안동 구간의 종점이었는데, 이 철도는 장래적으로 영덕까지 연장할 구상이 있어서 안동 시가지에는 서쪽 방향에서 동쪽을 향해 진입하는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물론, 안동 자체가 배산임수의 지형이라서 구시가의 남쪽이나 남서쪽 외엔 역을 둘 수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마는.
한편 중앙선 철도는 원래 구상은 있었지만, 1920년대의 조선철도 12개년 계획 수립 당시 지방자치단체나 상공인단체 등의 요망선으로도, 또한 본토 참모본부 등 군부의 의향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그래서 건설선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철도입니다. 이후 조선중앙철도니 조선종관철도니 하는 이름으로 언급은 되지만, 본격화가 된건 1937년 경 부터였습니다. 중국과 분쟁상태가 격화되고, 이에 따라 미국과의 갈등도 점점 극단화되어 무역제재가 슬슬 에스컬레이션 되기 시작하면서, 설비가 빈약해서 그즈음에 복선화가 진척중인 경부선 외에 해양 공격으로부터 이격된 백업용의 내륙철도를 건설하고자 하는 구상이 급부상했고, 그래서 중앙선 철도가 급부상해서 건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유지로 지정된 곳중에 안동이 포함이 되었고 말입니다.
당시의 건설에서 중앙선은 철강 등의 주요 물자에 대한 강경한 통제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까지 완공을 본, 그야말로 전략적 노선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경춘선이 북한강 수계의 수력발전 개발 때문에 사철임에도 불구하고 물자통제를 뚫고 건설을 하기도 했지만, 전쟁기에 건설이 계속 진행된 데에 비하면 역시 비교가 될 수 없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할겁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 건설된 중앙선은, 교량 부설 등 철강 사용은 가급적 억제하는 한편으로, 가급적 빨리 공사를 진행은 해야 해서 인력 동원으로 할 수 있는 토목공사의 비중은 상당히 크면서, 동시에 당시 경부선과 동등한 수준의 15퍼밀 이하(단 구단양~풍기 제외)의 구배를 가지는 철도로 건설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굵직한 철교가 좀 여럿 있는데, 이건 정말 피할 수 없는 경우에나 선택하는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 건설을 진행할때, 이미 경북선의 역으로 영업중인 안동역에 접속을 하면서 북향으로 진행할 수 있는 루트는 의외로 한정이 됩니다. 기존 경동선의 영천역에서 북상하여 올라올 때, 화목, 길안을 거쳐 안동의 동쪽에서 접속하여 서쪽으로 진출, 북상하는 루트와, 신녕, 의성을 거쳐 안동역 서쪽으로 진입, 이후 낙동강 하안을 타고 가다 북상하는 루트입니다. 화목-길안 루트는 평탄해 보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꽤 높은 산이나 계곡을 타고 가야 하고, 제대로 된 도시나 읍이 없다시피 합니다. 결국 선택지는 서쪽 루트를 고를 수 밖에 없었다고 봐야하고, 따라서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루트를 계획할 수 밖에 없었을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역에서 나오자마자 선로를 북쪽으로 틀어 영남산을 뚫고 올라가면 안되었는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안동에서 서지에 이르는 구간은 구불구불하게 가는데다, 안동 근처로 꽤 큰 교량이 하나 있고, 여기에 터널도 3개소나 건설이 되어 있어서 그리 쉬운 루트가 아니었던게 명백히 보입니다. 이렇게 건설할바엔 질러갔으면 되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질러가는 루트로 계획한다면 약 2km이상의 장대 터널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러고서도 해당지역의 지형조건상 15퍼밀 이하의 구배조건을 충족하는 선형을 맞출 수 없었을 거라는데 있습니다.
해방 이전의 터널건설은 지금과 달리 목재 지보공을 조립해 끼워가면서 사람에 의한 굴착(물론 착암기는 쓰지만)과 발파를 반복해가면서 파들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건설의 난이도도 높은데다, 굴착의 속도 역시 상당히 느렸고, 그렇기 때문에 그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히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터널을 피할 수 없다면 가급적 짧게, 길이가 문제가 된다면 여러개로 나눠서 짓는 선형을 고르는 경우가 많았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경우에만 굴착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는 중일전쟁 이후 진주만 공습을 향해가던 시점이어서 물자와 인력 모두 빡빡했고, 건설을 서둘러야 하던 상황에서는 2km가 넘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가장 난감한 구간인 죽령터널과 치악터널 만으로도 한계에 달할 수 밖에 없었을겁니다. 치악의 경우는 그나마 장대구배기는 해도 구배를 억제해서 건설할 수 있었지만, 죽령은 결국 도저히 각이 안나와서 전기운전을 전제로 25퍼밀 조건으로 건설을 했습니다. 여기에 안동에 저 장대터널만은 못해도 2~3km쯤 되는 장대터널을 계획하는 건 일단 무리였고, 우회해서 지상구간을 늘려갈 수 없던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당시의 안대로 결정이 되었을겁니다.
결국 이런 조건 하에서 교량을 더 쓸 수도, 하천을 추가로 좁혀서 새로 제방을 올릴 만한 상황도 아니다 보니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선형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즉, 의도적으로 철도를 가로지르게 설계를 했다기 보다는, 설계를 내다 보니 피해가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고, 당장에 건설은 급박한 상황이니 그런 설계가 나왔다고 보는 쪽이 맞다고 봐야할겁니다.
하지만, 이걸 그냥 일제강점기에 대한 피해망상으로 치부하면 안되는게... 일제 당시에 현지 사정을 봐줘가면서 일을 하는 데가 아니라는 점을 좀 생각은 해봐야 할겁니다. 더욱이 중일전쟁 이후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제의 상황은, 이런저런 시정에서 폭압적으로 행동하기 일쑤였고, 이런 경우에도 어김없었을거라 생각을 하면 될겁니다.
당장에 건설이 본격화되었던 1941년에는 대일금수조치가 돌아가고, 전쟁이 카운트다운에 가까운 상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거국적인 전쟁준비"에 기반이 되는 철도건설을 하면서 지장되는 건물과 토지를 어떻게 처결했을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토지매수 협의에서도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내놓으라는 식이었을 건 당연하고, 그 보상도 명목상의 것으로 부실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 본토에서 비슷한 시기에 건설이 본격화되었던 탄환열차 노선 역시 저런 식의 강압적인 토지매수협의나 토지수용이 일상적이었고, 불응하는 사람을 비국민이라고 몰아붙여서 경찰력으로 괴롭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모양인데, 하나 아래로 보던 식민지의 조선인이라면야 불령선인으로 몰아 구금해버리거나, 아예 옥사시켜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을겝니다.
지금이야 환경영향평가나, 타당성조사, 주민대상 사업설명회 같은 사전 설명과 협의가 어느정도 제도화되어있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 이런 제도가 그나마 제대로 갖춰지게 된건 6, 70년대 나리타 공항 건설반대 투쟁 덕에 큰 홍역을 치루고 나서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설명을 하지?' 수준으로 그냥 고지 날리고 언제까지 퇴거하라는 식으로 통첩하고 바로 대집행을 때렸던 국책사업이 나리타 공항인데, 전쟁 중에 "성전"이네 "대동아 공영권"이네 떠벌려대던 2차세계대전에서 국책으로 건설을 하던 사업에서 퍽이나 곱게 신사적으로 토지매수를 했을리는 없었을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압적인 건설진행 덕에 일제가 악의로 노선을 정해 철거했다는 구전이 생겼을거고 말입니다.
정부 홍보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이야기할때엔 좀 엄밀한 서술이나 사실관계의 조사가 받침이 되어야 하지 않나...라는게 이번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