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선 최초의 기관차는 모가형으로 불리는 "모걸 탱크" 기관차입니다. 위 그림에서는 육륜 연결 탱크기관차라는 좀 단순한 이름으로 기재가 되어 있지만 부번 1~4번에 2-6-0배치, 1899년 인천공장 조립에 브룩스 로코모티브 웍스 제작이니 빼박캔트 경인철도의 그 물건일겝니다. 구한말의 사진은 여럿 잘 나온게 남아있는 편인데, 정작 이후의 기록은 거의 안보이는 편이라서 이렇게 디테일이 나와있는 일제당시의 도면이 상당히 반갑다 할겁니다.
이 모걸 탱크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기관차기는 합니다. 1899년이면 영국에서는 스털링 싱글처럼 표정속도 100km/h를 마크하는 고속기관차가 영국에서는 다니고, 대충 텐더형으로 저 2배 정도의 성능을 가지는 기관차들이 미국이나 독일같은데서는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시절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나름 30여km의 본선에 쓸 기관차로 34톤짜리 기관차, 동륜상 축중이 10톤도 안되는 기관차는 여러모로 하찮아 보일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축중 20톤을 넘기는 디젤이나 전기 기관차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지금의 모터카나 될법한 이 기관차가 참 보잘것없어 보인달까.
하지만, 보기와 달리 모걸 탱크가 가지는 의미는 큽니다. 좀 볼품없어 보이는 체급같지만 19세기 말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래도 중형기관차는 될만한 크기로, 사실 경인선이 꽤 급구배를 가지는 미국식 설계의 좀 설렁설렁한 규격으로 계획된 노선인걸 생각하면 보기보다는 꽤 그럴싸한 규격이기는 합니다. 10여년 이전에 도입된 일본의 탱크 증기기관차 부류와 엇비슷한 성능이고, 1900년대 까지는 분명히 현역으로 단거리 노선에서 써먹을만한 성능대의 차량이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대개 이런 최초의 철도 부설에서는 없는 재정을 아끼느라 협궤에 소형 기관차를 끌어다 쓰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 대한제국 정부가 경의선에서 그럴뻔 하기도 했지만, 상당히 틀을 잘 잡아준 차량이라 평하는데 그리 아쉬움이 없달까.
차량자체가 미국식 설계에 따른 것도 한국철도로서는 꽤 의미가 있었는데, 볼드윈에 비하면 많이 작은 회사고 몇년 뒤에 ALCO사에 합병당하지만 나름 명문 메이커로 취급되는 브룩스 사의 기관차를 도입한 건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했고, 의외로 일본이 건설을 진척하긴 했지만 생각만큼 개입을 하진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 일본은 제대로 기관차를 자급하는 수준이 아니었고, 시험적인 소형 기관차류를 만든 정도에 불과하기는 합니다만, 만약 일본 취향대로 발주가 갔다면 미국보다는 영국제나 독일제를 가져다 오거나, 아예 궤간을 케이프궤로 고쳐서 자국 내의 중고 증기기관차를 팔아먹는 방향으로 갔을겁니다. 일장기와 성조기를 같이 걸어놓은 사진이 개업식에 많이 보이지만, 미국의 기술과 설계 하에 만들어진, 일본 자본의 철도에 가까운게 경인철도의 원형이라 할겁니다.
이 모걸 탱크는 인천공장에서 조립하고, 이후로도 인천기관구의 붙박이로 계속 운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경인선 투입은 거의 고정이었는데, 경인선 자체가 규격이 낮아서 미가, 파시 같은 후대의 대형기관차가 경인선에는 투입될 수 없었던게 그 이유입니다. 대신 모걸 탱크는 점차 열차 견인에 쓰이는 경향이 많이 줄어드는데, 일단 푸러형이라 불리는 걸출한 중형기관차가 보급되면서 해방이후까지 줄곧 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해방 이후 전철화 공사를 할때 찍힌 푸러형도 남아있을 정도니.
모걸탱크는 일제때 이루어진 자동연결기 일제개조까지는 받았던 모양이지만, 대신 공기제동장치 개조는 전혀 받지 않았던 모양이기는 합니다. 1920년의 스펙시트에도 공기제동기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시점엔 이미 다른 신조차량에는 공기제동장치가 쓰이고 있어서 대한제국 시절에 도입된 구식차량을 제외하면 보급이 어느정도 진척된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즈음, 1920년대 이후에는 모걸 탱크는 인천구내나 항만의 입환기 용도로 쓰이거나, 지금의 모터카들 처럼 공사자재류를 운반하는 공사열차나 화물열차 같은데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마침 당시 화물편람 자료에도 경인철도 출신 무개차들은 표준화차보다 작은 규격 덕에 보수작업용 자재나 철도가 하청으로 건설사 등지에 시킨 일감의 운반 에나 쓰이고 있는 걸로 언급이 되니 말입니다.
그 최후에 대해서는 좀 명확한 자료가 아직까진 발굴된바가 없고, 아마 1970년대 이전의 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실패한 사업들은 흐지부지하게 묻어버리는 철도청의 분위기상 결론이 나오진 못할거 같다 생각은 듭니다. 일단 해방후에도 남한에 3대가 남아있던건 미군정 자료에서 확인이 됩니다. 아마도 인천 소속으로 남아있고, 일제 말기의 총동원 상태에서 1대는 고장이나 사고로 이탈한 후 부품용도로 전용되지 않았을까 추정이 됩니다. 아니면 1호기라서 퇴역후 전시차로 용산에 전시되었을 수도 있을겁니다. 대한제국 황실용 객차도 당시 그렇게 보존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있긴 했던지라.
문제는 역시 한국전쟁이라 할겁니다. 용산공장은 미군의 사용거부 폭격을 전쟁 초에 뒤집어썼던 모양이고, 이 과정에서 용산역전에 있던 철도국 건물이나 그 인근 시설물들이 멀쩡하기는 어려웠을겁니다. 또 이때 살아남은 차들은 북한이 노획해 가서, 데로이/니같은 경우 북한에서 발견되기도 했다거나 한 예가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모걸 탱크의 경우 인천에 붙박이로 쓰였을건데, 이 말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폭격에 노출되었을 가망이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마침 상륙지점 세 곳중 하나가 인천역의 북쪽 어디께였고 전쟁피해를 입어 건물손실이 대거 생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운이 제법 필요했을거라 봅니다.
하지만 좀 더 의외는, 1960년대의 교통백서에서 기관차 보유 목록에 차령 50년이 넘는 기관차 2대가 통계에 잡힌다는 겁니다. 1960년대 기준으로 50년 이상의 차령을 가지려면 경인철도 아니면 경부철도 소속 차량 외에는 나올수가 없는데, 경부철도 차량 중에서는 초기 공사열차용도로 도입한 푸러형 초기차들 외에는 이정도 차령이 나올게 없다시피 합니다. 확정적으로 말할수는 없지만, 애매한 수량과 이상하게 높은 차령으로 미루어서는 구내입환기 정도로 근근히 살아남은 2대의 모걸 탱크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남습니다. 물론 세부 형식 구분이 나오질 않고, 60년대 중반 이후엔 통계에서 사라져버리는지라 진실은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