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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궤 수인선의 시초.

12/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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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드디어 수인선이 폐선 한지 24년 9개월 만에 전 구간 부활했습니다. 계획선으로 따지면 1972년에 인천항 제2도크 개설에 따른 인입철도로서 부곡 경유로 광궤화 부설이 계획되었던 걸 기준하면 46년쯤이 걸린 장기계획인 셈입니다. 여러모로 아득했던 철도가 끝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감개가 새롭다 할겁니다.

 수인선은 늘 경제성이 모자란다, 사업성이 없다 라고 토가 달리던 철도고, 정말 장기구상에는 늘 들어가면서 실제 실현은 제대로 되지 않던 베이퍼웨어같은 철도였습니다. 95년 폐지 시점에는 민자사업으로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무산되고, 재정사업으로 하면서도 민원과 예산문제 등으로 줄줄히 밀리기 일쑤여서 착수하고서도 20년을 넘게 장기순연했다는 점에서 참 눈물나는 철도라 할만 합니다. 그런데, 과거 왜정 시절에도 이건 별로 다르지가 않았었습니다.

 수인선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1927년에 책정된 '조선철도 12년 계획' 이라는 투자계획입니다. 정작 철도국 사업선으로는 채용되지 못했지만 인천상의와 인천부가 연대해서 "인천에서 수원을 경유하여 동해안 강릉에 이르는 횡단철도"라는 요망선으로 제안된 바 있습니다. 이 즈음에는 그래서 일본 본토와 비슷하게 기성회니 촉진회니 하면서 대개 일본인으로 구성된 지방지주나 사업가들, 그리고 관공서 사람들이 이래저래 활동을 했었는데, 수인선은 당시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었는지 수인철도주식회사라는 사철로 실제 법인 발기와 사업허가신청까지 가기는 했었습니다.

 문제는 이 수인철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자본 모집이 매우 불량한데다, 경인선과 경쟁관계로 굴러가야 해서 당시 철도국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경쟁선이었기에 자세가 굉장히 소극적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여하간 수인철도가 제대로 안돌아가자, 1926년부터 설립운동을 벌여 1928년 겨우 법인설립을 달성한 경동철도를 통해서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던걸로 보입니다. 이 시점에서 수인선은 경부선과의 연계에 초점을 맞춘 표준궤 철도가 아닌, 경동철도의 수려선과 연계하는 협궤 철도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사실, 경동철도는 사철치고는 굉장히 늦게 발족이 되었고, 덕분에 분위기 좋던 1920년대 초반을 다 넘겨서 자본모집에 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그 덕분에 결국 자본이 모자라서 1928년 착수를 하면서 표준궤 대신 협궤로 부설을 결정했는데, 여기에 붙어서 부설을 하게 되 수인선도 직결운전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되어 762mm의 협궤로 결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려선 쪽은 워낙에 건설의 어려움이 심해서, 1970년대 철도청 문헌에서 언급된 바로는 최소곡선반경 R=160, 최급구배 30퍼밀에 달하는 그야말로 막장의 냄새가 풀풀나는 그런 철도였습니다. 영업은 그나마 쌀 반출이 호조였고, 어찌되었던 교통자체가 빈약하던 이천, 여주 일대에 협궤나마 철도가 들어간 덕에 그런대로 되긴 했지만, 썩 훌륭하진 못했는지 수인선은 이후 추가로 자본모집을 1935년에 해서 겨우 착수, 1937년에 완공을 봅니다.

 수인선의 개통은 경동철도에 있어서는 꽤 긴요했던 모양인데, 일단 철도국선인 경부선 수원역에서 환적 부담 없이 인천항을 통해 쌀을 반출하고, 비료나 시멘트같은 자재를 반입할 수 있게 되어서 운임경쟁력이나 수송효율을 높힐 수 있었던 모양이고, 또한 인천 일대의 염전으로부터 소금을 수송하면서 추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점 덕에 인천측 종점인 인천항역을 부랴부랴 확장하고 인입철도를 더 까는 등의 활동이 개통 직후부터 이루어졌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덕에 이런 호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중에 일본 본토에서는 이른바 대합동이라 불리는 정부의 철도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잘한 사철회사들을 정리해서 큰 사철회사나 아예 국철에 편입시켜서 수송효율성을 확보하고자 추진된 정책인데, 경동철도 역시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당시 사실상의 총독부의 제2철도 격인 사철회사 조선철도 주식회사에 합병되어버리게 됩니다. 이 시기의 구조조정은 기록이 소략하고, 신문등으로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는 것들이어서 종종 누락되는데, 1942년에 이 정리가 단행되어서 경동철도가 아닌 조선철도 수인선, 수려선이 되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철도 외에 2개 사철이 군정청 명령으로 국철에 수용 편입되었는데, 이때 수인선도 같이 국철에 편입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남북 분단이 이루어지면서 수인선, 수려선은 황해도의 토해선과 함께 남한측에 남은 협궤선이 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토해선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버리면서 사실상 남한 내의 유일한 협궤철도로 남겨지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삼척에 협궤를 쓰는 산림철도가 남아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철도선으로는 취급하지 않았던 모양인데다 그나마도 1959년 사라호 태풍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폐지된지라 1960년대 이후에는 이견없이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수인선의 종말은 자동차 교통의 발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데, 수인산업도로가 70년대 확충되면서 사실상 수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될겁니다. 수려선이 1972년에 폐지되고, 같은 해에 모두의 인천항 인입철도 부설 계획이 나오면서, 표준궤 개궤 이후의 수인선은 그야말로 그 사명을 다해 폐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나마 연선의 염전으로부터 소금 수송이 근근히 남아있었고, 또 경기도 내에서는 꽤나 격오지 취급을 받던 지역에 놓였다 보니 일단은 개궤와 동시에 폐지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보이지 않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관행, 그러니까 철도재정이 늘 압박을 받기 때문에 최대한 확보된 토지 등을 활용하는 걸 생각하면 양 선을 병행 운전하는 건 계획의 이야기고 부설단계에서는 없었던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수인선의 존재의의를 갉아먹던 병행선인 경인선이 수인선을 이때 살려낸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저 인입철도 부설계획은 실은 전혀 실행되지 못하고 사실상 보류가 되었고, 이를 대체해서 부설된 것이 인천에서 학익 인근까지 뻗은 표준궤 인입철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천항 인입선은 물론이고, 학익동 일대의 특정한 공단으로부터 물자 수송까지 인천역 경유로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수인선은 일단 개궤로 인한 폐선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인천항(남인천)에서 송도까지의 철도를 상실하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 좀 더 연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인천 시내까지 갈 수 없게된 결과는 여객의 이탈을 초래했고, 이후 인천 시가지의 확장, 남동공단과 반월공단 등 안산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서 수인선은 흡사 인디언들 처럼 이리저리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송도에서 남동까지는 남동 신시가지 확장을 이유로, 이후 공단 조성을 이유로 계속해서 소래, 원곡(현재의 안산) 까지 노선이 단축되다가, 안산선 전철 개통 이후에는 그나마도 병행선이 되어서 한대앞~수원까지로 단축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전철 환승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운임 정도밖에 없는, 하루 3왕복짜리 망한 노선이 되었고, 차량의 노후화를 더 견디다 못한 끝에 1994년 연말 부로 폐지가 되게 됩니다. 

 복선전철화 완공까지 민간투자사업 추진과 좌절, 화물기능의 상실, 지하화, 시공사 부도 등등 협궤 이후의 수인선도 굉장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는데, 그 최초의 태생부터가 국철 병행선으로 애매한 위치의 노선을 지역에서 자본을 탈탈 털어 겨우 개통시킨 사철이었다 보니, 그 타고난 운이 그런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이제는 완전한 복선전철 광역철도가 되었으니 별 탈 없이 융성하기를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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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의 종언.

22/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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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역 화물운송 역사의 뒤안길로

  카더라 비슷하게 전언을 듣기는 했지만, 한달 정도 뒤에 보도로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름 중대차한 사건인데도 지역언론에서 한달이나 늦게 인지했다는 거 부터가 참 무상하다 할 거 같습니다. 일개 정거장의 업무개폐는 사소한 사건일지 모르겠지만, 한국 철도의 기원이라 할만한, 그리고 전성기에는 무수한 화물지선이 설치되어 수많은 화물이 다니던 인천역에서 120년만에 화물 취급이 중단되는 사건의 역사적 무게감은 작지 않다 할겁니다.

 반쯤 허풍을 심어 최초의 7역이라 말하는 경인선 초도 개업역들 중엔 아직 화물취급이 남아있는 오류동역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왕년에는 거의 200만톤에 달하던 화물이 유동하던, 그리고 근래에도 꽤나 특색있는 화물의 거점이라 할만한 인천이 화물 취급 중단에 이른건 철도물류가 얼마나 한계에 몰려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 할겁니다. 구로삼각선과 용산삼각선이라는 병목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실 열차 횟수를 늘리기도 어렵고, 그리 선형이 좋다고 하기도 그런데다, 인천역 자체부터 시작해서 장대화물열차를 취급하기 그리 여건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사실 코너에 몰려있었다 할겁니다. 그나마 수인선의 화물기능이 제대로 활성화 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아시다시피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니 활로가 전혀 없었다 할거고.

 욕심이기는 하겠지만 부정기 화물이라도 취급기능 자체를 전폐하기 보다는 유지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항만이 제대로 연계되는 철도 물류 취급역이 서해에는 제대로 남은 데가 없다시피 하고, 또 군수나 중전기기류 같은 특수한 화물취급은 항만으로부터 양륙해서 내륙으로 가는데 있어 철도가 필수적이다시피 합니다. 또한, 입환용 기관차가 상시 배치되어 있어서 열차 고장시에 동원할 수 있는 주요자원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화물기능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볼 가치는 있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철도화물 자체가 비채산이다 보니 사업성 확보를 위해서는 뼈를 깎을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나마 수도권 내에서는 몇 안되는 거점을 날렸다는 점에선 많은 아쉬움이 있달까 그렇습니다.

 아마 이후에는 지자체와 시설부지의 개발이 살살 물위로 올라오기 시작할거고, 방대한 지선과 구내선로를 가진 인천역의 흔적은 주박기지 정도나 겨우 남겨지는 그런 시대가 언젠가는 오게 될겁니다. 바다 근처의 공공소유의 평지, 그것도 전철이 이미 접속되어 있는 부지는 매우 가치가 있는 부지일테니 시일의 문제지 개발이 안될리는 없을거고 말입니다. 어차피 철도 시설물들 중에서 이미 보존 가치가 있을만한 건물이나 시설물들은 한국전 이래로 거의 잃어버린 듯 하니 딱히 보존시설을 둘만한게 있을거 같진 않습니다.

 다만, 좀 욕심을 내본다면, 인천역에서 인천 남항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관광용 철도로, 가능하다면 소형 증기기관차가 견인하는 노선으로 유지를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매연 등의 문제가 생긴다면 CNG를 사용하는 보일러로 만들수도 있을겁니다. 지역 노선으로서의 필요가 있다면 무가선 트램을 혼합운영하고, 도중 교행역을 더 만들어넣는다면 가능할거고 말입니다. 겸사겸사 인천역의 화물취급 시설을 차량기지로 겸용하면서, 이 차량기지를 일종의 살아있는 재현 워크숍으로 박물관처럼 활용한다면 그것도 의미는 있을겁니다. 문제는 재정적으로 절벽에 몰린 상황에서 이런 돈쓰는 사업을 할 수 있냐겠습니다마는.

 여하간 역사적 사건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잊혀지는 사안인지라 코멘트를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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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역 북부의 신호취급실 관련.

2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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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장히 과거의 대한뉴스 영상이 우연찮게 걸려 떴길래 보는데, 미카3-31로 추정되는 증기기관차나 구식 객차의 풍경이나 운전사령으로 추정되는 전화교환실의 풍경 들이 여러모로 인상적이지만 개인적으로 후반에 보이는 신호레버 취급 장면 부분에 좀 포인트를 맞춰볼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

 대개 재래식의 신호시스템에서 완목신호기와 함께 다뤄지는게 기계식 연동장치입니다. 인력으로 레버를 동작시키면, 각 분기기들이 동작을 하게 되고, 여기에 맞물린 캠과 키 들이 교차하면서 이후 진로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굉장히 구식의 시스템입니다. 일전에 미국의 공압시스템을 인용했었지만, 영국에서는 여전이 저런 기계식 시스템이 현역으로 남아있거나 보존시설로 남아있는 곳들이 곧잘 있습니다. 아래 2012년 영상의 풍경이 그런 사례입니다. 복선구조로 이른바 쌍신폐색기와 동등한 장치를 써서 서로 열차의 진입을 통지하고, 신호기와 분기기를 취급해서 각 폐색신호기를 제어하는 그런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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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우리나라 철도에서는 완목신호기는 있지만, 저렇게 한 신호취급실에 모든걸 집약한 구조는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손이 많이 가기도 하거니와, 기계적으로 꽤 복잡한 장치다 보니 막 질러댈 만한 여건이 아니었던게 컸던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제2종 연동장치라 해서, 분기기는 각 현장에서 취급하고, 신호는 그나마 집약해서 동작시키는 식의 물건들이 보편적이었습니다....만, 저 대한뉴스 영상 후반은 제1종이라 불리던 집약된 신호취급실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꽤나 귀중한 영상클립이라면 클립입니다.

 저걸 어디서 찍었는가를 보니, 지금도 건물이 남아있는 서울역의 북부 구내, 그러니까 경의선 승강장 북쪽 끝단에 있는 폐건물에서 찍은게 아닌가 추정이 됩니다. 도로쪽에서는 간판으로 가려져 안보이지만, 승강장 끝단이나 서울로7017에서는 보이는 건물인데, 위치상으로는 신호관계 시설 아니면 도로측의 노면전차 관련 시설이 아니었나 생각했는데 위 영상에서 신호취급실인게 확실히 확인이 됩니다. 아마도 건물의 최상부는 유리로 둘러쳐진 레버 등이 집약된 취급실이고, 아래쪽 공간은 연동장치 기계가 들어가 있는 구조였을겁니다. 영상은 단등식 신호기들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완목신호기를 대체해서 전기식으로 동작하도록 개량이 된 상태로, 수색역 정비 이전에 서울역 승강장이 3면 5선에 두단식 1선, 그리고 나머지는 화물 등의 구내로 쓰이던 시절의 광경으로 보입니다. 

 사실 서울역은 보안시설적인 성격이 있어서 개방하기가 만만치는 않아보이지만, 이 시설물을 일종의 신호기기류 전문의 박물관이나 카페 정도로 개발해서 개방하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기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시설로, 해방이전 신호시설물 중에 건물까지 통으로 남은건 이거 뿐인데다, 또한 이런 시설물은 대규모 역에나 설치되던 거라서 의미가 클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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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전철 구상.

29/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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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 역사 관련된 책에서 1930년대의 전철화에 대해서는 그냥 그런것도 있었다 정도로 터치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딱히 자세한 자료가 남은것도 아니고, 간선망 위주의 서술에서는 통근전철 같은 이야기는 지엽적인 이야기에 불과한데다, 일제때의 건 일본인들 손에 의해 나온 이야기다 보니 딱히 더 다루기도 어중간하고, 사실 결과물을 낸게 없기 때문이라 그렇다 할겁니다. 그래서 정규자료 외에 옛 신문 자료를 찾아보니 조금 더 디테일한 이야기가 있어서 옮겨둡니다.

 1939년도 기사에 전철화 계획이 언급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배경을 병참기지화에 따라 산업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여기에 대응하여 철도국은 속도향상과 함께 수도권의 전철화 구상을 마련했다고 언급을 합니다.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에 전기과를 신설하고 본토 기술자들을 초빙해 왔다고 하는데, 단순히 전기 시설물의 증가만 본게 아니라 전철화를 전제로 깔고 접근을 했던게 여기서도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구상의 원문을 알기는 어렵지만, 기사에서 다루는 1차 계획은 경인선 39.9킬로미터의 전철화 계획이었습니다. 직류 3천볼트를 사용한 급행전차를 운행하는 것이 그 골자로, 복선화와 동시에 차량 20대를 제작, 2량 연결 운전을 전제로 총 운전시간 40분, 배차간격은 매 20분 간격 운전을 하겠다고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광역전철에 비하면 초라한 볼륨이기는 하지만, 저당시의 인구규모는 지금에 비할바가 아닌데다, 당시 전철로 통근 통학을 하는 계층이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저정도로도 충분히 납득가능한 공급은 되었을거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당시의 경인선은 경부선 등지에 쓰이는 대형 기관차가 다니지 못하는 비교적 시설이 빈약한 선구였던지라 전동차 투입으로 가닥을 잡는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 건설기간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로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뭐 실제 역사에서는 아시다시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복선 노반 공사 정도가 어느정도 진척되었다던 말은 있었습니다. 이거보다는 당장에 전쟁에 필요한 군수수송용 인입선 같은게 더 급했고, 대미개전 이후에는 아예 자재 확보가 불가능했으니 더 진행될 건덕지도 없었을거고 말입니다.

 이외에 잘 알려진진 복계-고산간의 전철화 사정도 언급이 되는데, 당시 해당 구간 약 53.9km 구간은 탱크기가 뒤에 붙어 겨우 운행할 정도의 험준한 구배구간이어서 암에 비유될 정도로 심각한 수송정체 구간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건 전쟁 수행 문제에도 꽤 뜨거운 이슈였는지 전쟁기간 중에도 계속 진행되어 실행된 바 있습니다. 해방후에는 북한이 인수해서는 철거 유용했다고 합니다마는.

 그리고 2차 계획에 언급되는 노선들은 꽤 쟁쟁한데, 경성(서울)에서 경의선 토성에 이르는 82.5km, 경성에서 수원까지 41.7km, 그리고 경성에서 철원까지 101.3km 구간을 전철화 하여 급행전차를 운행하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철도국 직영으로 경성역에서 남대문통 조선은행까지의 1km 구간에 지하철을 설치해서 급행전차를 넣겠다는 구상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토성역과 철원역은 꽤 의미심장한 역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토성역, 지금의 개풍역의 경우엔 개성을 지나 위치한 역으로 황해도 각지로 향하는 협궤사철선의 접속역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즉, 경의선축과 황해도 협궤망의 트래픽과 접속이 가능한 거점까지의 접속을 확보하는 의도를 가진 노선 구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철원쪽의 경우도 비슷해서, 사실 이쪽은 도시화 면에서는 의미가 없는 축이지만, 금강산전철선이 접속하고 있어서 전철망의 접속이라는 차원에서 접근이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겁니다. 뭐, 당장에 수원까지의 노선구상도 일단 경기남부의 거점도시인데다, 당시 건설이 완료된 수인선, 수려선의 접속을 배려한 것이었을거라 생각이 되고 말입니다.


 한편으로 지하철 쪽은 철도국이 아닌 경춘철도에서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었는데, 1939년 5월 30일에 제기정에서 동대문까지의 약 2km구간에 대해 사업허가를 신청했고, 그해 12월에 격론 끝에 허가가 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노선은 어디까지나 1기 노선으로 장래 경유지는 당시 경춘선의 기점인 현 제기동의 성동역에서부터 동대문까지지만, 이후 예정선으로 화신앞(현 종각역)에서 미츠코시앞(현재의 신세계 명동점)을 거쳐 경성역에 이르는 노선축이었습니다. 현재 노선에서 시청앞 경유가 아닌, 종각즈음에서 크게 노선을 꺾어 남대문로 축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구상인데, 위의 철도국 구상은 이거와 연계하되, 사업성이 확보됨직한 남대문통 까지는 국선 구간으로 하려는 구상을 깔고 있던걸로 보입니다.

 사실 경춘철도 주식회사의 야망은 처음 노선 건설 시부터 꽤나 컸는데, 철도국은 초기에 성동~춘천간의 건설신청을 접수했을 때 성동 기점이 아닌 청량리를 기점으로 할것을 강력히 권고했었다고 합니다. 건설비 부담을 덜 수 있는데다, 국철과의 연계를 우선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안이고, 해방 이후 계통정리를 하면서 청량리를 기점으로 정리가 된바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춘철도의 경영진은 노선의 전체 구성상 한사코 성동 기점을 고집했고, 전시체제로 인한 자재확보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일본 본토에 가서 적극적으로 주장을 관철시키기까지 해서 전구간을 완공시키기까지 했었습니다. 보통 철도국이 사철에 행정지도를 해서 안을 따르게 하는데, 경춘철도는 이례적으로 이를 뒤집어냈다는 점에선 아마도 경성부의 도시문제 해결 의도가 배경에 있긴 했겠지만 굉장히 예외성이 많이 보인달까.

 결과적으로는 1940년 1월에 미일통상항해조약이 폐지되어 양국간의 무역이 사실상 중단되기 시작하고, 10월에는 미국의 대일 고철 수출이 중지되는 등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재와 노동력의 수급이 한층 더 막장화되었기 때문에, 12월에 공사인가가 나가긴 했어도 결국 한삽도 뜨지 못한채 폐안이 되어버린 걸로 보입니다. 다만 이 계획 자체는 당대에 어느정도 알려져 있던 사안이었던 모양인지, 해방후에도 일제시대가 계속되었으면 50년대엔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을거란 이야기를 하는 배경이 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의 1호선 보다는 이쪽이 청량리 접속이 없다는 점만 빼면 좀 더 그럴듯한 노선계획이 되긴 했을거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마는 뭐 당대에 설명이 안될만한 이유가 뭔가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여하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은게 이 즈음의 계획인데, 지금에 와서야 큰 의미를 두긴 그렇지만 한번 정도는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긴 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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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기기의 "캐딜락".

19/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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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영상은 사용 중단된 펜실바니아 철도의 해리스버그 신호실(해리스 타워)을 시뮬레이션 형태로 복원해서 동작시켜놓은 박물관의 영상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시설물이기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 금단의 시설물쯤 되는데, 사용이 폐지되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게되어 영상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철도신호는 철도를 안전하게, 그러면서도 효율적으로 다니게 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장치입니다. 그만큼 당대에는 최신의 기술을 집약한 것들이 사용되어왔고, 특히 20세기 전반에는 미국의 기기들은 그야말로 공업력을 집약해 만들어진, 경제력에 부합하는 고급품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영상의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신호기기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제어조작반에 해당하는 기계로, 흡사 핀볼 머신 처럼 생겼지만, 기계식 컴퓨터와 공압장치의 원격제어 기능, 그리고 그 동작상태를 피드백하는 표시부까지 갖춰진, 거의 기능을 그대로 갖춘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이아웃이 지금 보면 좀 단조롭게 보이지만, 실은 저게 전통적인 신호취급소의 구조를 옮겨놓은 거라서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2층건물 구조의 신호취급소들도 레버의 배치는 저렇게 일렬로 죽 늘어놓고, 각각의 레버 앞 선반에 동작상태를 현시하거나 관계처에 알림용 벨이 동작하도록 하는 그런 방식들이 쓰였는데, 이것이 이어져 온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모자이크 패널이나 컴퓨터를 사용한 방식이 보급되면서 2차원 평면에 배선도를 그리고 거기에 조작스위치를 배치하는 방식이 되었지만, 이때의 넘버링이나 배열 기준은 여전히 쓰이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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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신호취급실의 배치(출처 : 위키미디어, Nils Öberg)
 일단 저 해리스 타워의 기계장치는 연산부는 기계식 계산기와 비슷하게 톱니바퀴와 래칫 등으로 연동 동작하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걸로 보이고, 여기에 연결된 스위치들의 동작에 따라서 각 선로전환기에 공기압력이 공급되어서 동작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와이어 내지는 현장에서 인력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는 동작의 속도나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기에, 아예 공기압으로 기기를 굴리는 방식을 쓴겁니다. 신호기는 그나마 완목식이나 단등식이라면 모터 등에 의해 동작하는 방식을 취했을거고, 다등식을 썼다면 릴레이로 동작을 했을겁니다. 지금 사용하는 장치에 비교해서도 기능적으로 전혀 떨어지지 않는 물건인데, 보급 초기에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방식에 비하면 매우 편리하고 정교했기 때문에, 당시의 고급차인 캐딜락에 비교할 정도의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트랜지스터로 대표되는 전기기술이 발달, 보급되었기 때문에 전기에 의한 방식이 세계적으로 보급이 되고, 몇몇 나라에서 쓰인 공압과 기계식 연산장치에 의한 방식은 그리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정교하고 비싼데다, 유지보수가 까다로운 물건이었고, 그래서 이걸 도입할 만한 곳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들의 대규모 터미널 정도에나 한정될 정도였고, 그나마도 2차대전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전기장치로 동작시키는 쪽으로 대체가 많이 이루어졌기에 이후로도 희소한 장치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해리스버그는 펜실바니아 주의 주도로, 그리 큰 도시는 아니지만 왕년에 미국의 주요 철도회사로 손꼽히는 펜실바니아 철도의 주요 터미널중 하나였습니다. 현재에는 행정기관들이 시 인구의 고용을 상당부분 책임지지만 원래는 철강이나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되던 곳이었고, 뉴욕과 시카고를 연결하는 펜실바니아 철도의 본선을 1930년대에 전철화를 했을때 그 종단점이 이 해리스버그였다고 합니다. 이 해리스타워는 1928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후 해당 철도가 파산하여 이래저래 이합집산을 거치면서도 계속 사용되어 오다 1990년에 신형 기기로 대체되면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비슷한 기기들은 설치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의외로 여전히 쓰이는 곳들이 남아있는 편인데, 현용의 것은 미디어 보도 정도로만 노출되는 만큼 저렇게 동작을 디테일하게 보여지지는 않는 편입니다.

 철도에 있어서 차량이나 역 정도만이 보존의 관심이 되는 편인데, 사실 철도는 기술과 제도, 노동의 총합체라 할만큼 다종다양한 서브시스템들이 존재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동작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례를 보면 단순히 그 기물 정도에 천착하기 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관점에서 다뤄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뭐 극단적으로 영국에서 증기기관차와 통표폐색 시스템 하에 돌아가는 보존철도까지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냥 폐지된 고물을 모아놓는 것 이상은 우리도 이젠 해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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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경인 메트로폴리스"와 철도.

14/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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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축을 따라서 무수한 도시계획들이 일제때 튀어나왔으니,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대경성이라는 이름에 맞게 유수의 거대도시가 되고 그 주변부를 다수의 순환 철도망이 구축 되었을거라는 썰을 누군가가 쓴 모양입니다. 이게 왜 거시적인 역사를 보지 않고 미시사를 파면 이상해 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일제가 경인축을 따라 도시를 개발하게 된 배경은 국제정세의 급변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자초했던 것이었고. 괴뢰국가로 만주국을 설립하고, 공식 비공식으로 끊임없이 중국과 무력충돌을 일으키면서 야금야금 세력을 넓히다가 결국 중일전쟁으로 비화가 됩니다. 물론 군수품 무역때문에 둘 모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어물대서 사태니 사변이니 하는 용어를 썼지만, 뭐 지금에 와서는 전쟁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는 합니다. 

 이 전쟁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온것이 경인축선의 개발이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한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경인권 전체, 즉 현재의 부천, 부평 일대의 개발이 본궤도에 오른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부평 일대에 병기창이 들어선 것이나, 인천일대의 공장들이 입지하게 된 것도 이때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경인축선의 개발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인천부를 중심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본토의 영향을 받아서 대도시를 지탱하기 위한 경인선의 전철화가 주장된 바 있기는 하지만, 정작 본격적으로 전철화가 추진되기 시작한건 바로 중일전쟁이 코앞에 닥쳐왔던 1937년 6월의  철도국 전기과 설치였고, 그 배경은 이 거시적인 정세에 있다 할겁니다.

 이 1937년부터 1945년 까지의 개발은 전시체제 하에서 병참산업을 일으키고 이를 수송하는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물론 이미 1920년대부터 총독부의 정책이 아주 무식하게 쥐어짜는 정책 일변도에서 점차 어느정도의 경제개발과 온건한 문화사회정책을 갖춘, 당근과 채찍을 같이 쓰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서 도시화와 인구증가가 촉진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동시에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민수부문의 억제가 강해졌고, 개중에서 전시체제에 기여할 만한 사업들 위주로 인프라 투자가 집약되게 됩니다. 이 대표적인 케이스 삼척철도나 경춘철도를 들 수 있습니다. 전자는 일본 내의 화력발전 및 시멘트 생산을 위한 무연탄 반출의 목적에서, 후자는 북한강으로부터의 전력 개발을 위해서 물자통제가 압박해 오는 와중에서도 차근차근 건설이 됩니다. 뭐, 지하자원이나 공업면에서 이미 일정지분을 가진 북한지역이야 말할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철도망은 전쟁 수행에 영양가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추진이 갈리는게 대부분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병참이나 군수공업에 직접 관련이 있는 철도들에 대해서는 물가고와 물자난 속에서도 꽤나 적극적으로 지원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철도건설의 핵심자재라 할만한 철강의 수급은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중앙정부가 직접 배분을 컨트롤하게 되었기에 이 시점에서 정부의 의사에 합치하지 않는 철도는 레일 수급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추진력이라는 것도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사실상 무력화되다시피 합니다. 조선 내에서 자급되는 자재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본토로부터의 물자가 없으면 건설 추진 자체가 굉장히 해골복잡해지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무한정 확장되면서 민수수송을 위한 선박 수급이 꼬이기 시작하고 반대로 철도로의 수송 전가가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건설은 무슨 당장 보선에 충당할 자재도 답이 없는 상황이 됩니다. 뭐 그래도 아예 0에 수렴하는 상황까진 가지 않다 보니 어찌되었든 이시기에도 노선 건설은 추진되고 이래저래 사업은 돌아가지만, 1943년 이후부터는 이것도 거의 불가능해져서, 결국 나온것이 금속류회수령에 근거한 철도자재의 공출이었습니다. 1944년에 이루어진 일인데, 이렇게 회수된 자재를 전쟁수행에 필요한 항만, 탄광, 공장 인입선, 경의·경부선 복선화, 수색, 평앙, 부산 등지에 조차장 신규설치 등에 충당했습니다. 

 즉, 전시체제가 돌아가는 한에는 철도망 자체가 거시적 국토계획이나 도시화에 따라가는 그런 한가한 일은 있을수가 없다고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닐겁니다. 물론, 전시체제의 군수공업들 때문에 통근량이 급증하고, 그 덕에 철도여객수송이 급팽창한 측면도 없잖아 있지만, 일단 1941년 이후에는 불요불급한 여행은 자제, 4km정도는 걸어다니자 등의 지금 봐도 찰진 개드립이 정책으로 돌아가는 그런 시대였고, 군수수송 증가 때문에 기관차가 모자라서 여객열차를 삭감하고, 그것도 모자라 말년에는 아예 특급, 급행열차가 없어지는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왜 그런 망을 안갖췄냐 나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뭔 한가해 빠진 비국민스러운 이야기냐 라고 생각했을겁니다.

 뭐 일제시대의 철도망 구상의 골격을 이루는 1927년의 조선철도 12년 계획의 노선망을 보면 일본인 입식민을 위한거긴 해도 일제의 국토 및 경제 개발의 의욕이 없는 건 아니기는 하지만, 사실 그 큰 틀의 그림에서는 일본제국 육군 참모부의 필요가 우선시된 계획이기도 했었습니다. 애초에 일본 국내의 지역 요망노선들을 하고자 하는 정치인들과 예산투쟁을 해서 저걸 입안시킨 것 부터가 국가전략이라는 목적 없이는 택도 없는 이야기일거였고, 실제 집행에서도 북한지역의 간선들, 이른바 만선 연락 노선들이 1930년대에 어떻게든 완공되었던거에 비해서 남한지역의 신규 간선들은 해방시점까지도 미완성 구간이 남아있었으니 뭐 각론은 몰라도 총론에서 병참 우선을 뒤집을 이야기는 없다고 봐도 될겁니다.

 경부축의 중시라는 문제 역시 일제시대의 병참체계나 행정 시스템을 생각하면 변할수가 없는 사안인데, 당시 일본의 세력권 내를 달리는 철도의 중추는 도카이도선-산요선-부관연락선-경부선-경의선-남만주본선으로 이어지는 축이었습니다. 이 국제간선의 용량문제 때문에 경부선과 경의선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와중에 복선화가 진척되고, 또 군부의 의향이 담긴 본토의 탄환열차 구상에 맞춰서 가능한 한 최대한의 선형개량을 반영해 넣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중앙선(당시의 경경선) 같은 철도가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이름도 올리지 못하다 1936년에 부랴부랴 착공된 것도 사실상 외길이고 경기도 일대에서는 해안 및 대하천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성이 있어서 그 백업으로 계획이 된거였습니다. 이 구조가 해방 이후에도 고착화된 것이 경부축 집중문제인 셈이어서 후대 위정자의 잘못이네 아니네로 말하기는 간단한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만약 중일전쟁으로의 진척이 없어서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거나 2차대전의 후과로서 신생독립국이 되었다면 아마 중앙선을 위시해서 철도망의 1/3정도는 없었던 일이 되었을거고, 만약 1960년대 후반까지 일제 치하였다면 본토의 경영합리화 논란에 덩달아 여러 자질구레한 선들이 잘려나가기 시작했을겁니다. 뭐 1944년에 선로공출 대상이 되었던 노선들이 1945년을 넘겼더라도 아마 1960년대에는 다들 적자선으로 칼부림의 대상이 되었을거라, 그야말로 명예로운 폐선을 당했다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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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차와 지하철의 미싱 링크 : SS트램

24/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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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촬영 김현옥 시장과 "신형전차"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시의 도시철도 역사를 뒤벼보다 보면 1968년 노면전차 폐지와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사이의 기간은 일종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호선의 착공이 1971년의 일이니, 아주 좁게 보더라도 1968년에서 1971년 사이의 기간은 사실상의 공백 상태인데, 당시의 일처리를 생각하면 이례적으로 긴 공백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 기간 동안엔 어떤 일이 있었는가가 좀 뒤벼볼 요소가 있다 할겁니다만, 문헌이 별로 남은게 없어서 기사 등의 단편으로 찾아볼 수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일단은 노면전차의 폐지방침은 1966년 즈음에 시청 내에서 거의 정해지기는 한 방향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주된 문제로 든게 교통 흐름에 방해되는데다 느릿하다는 점, 그리고 운임규제를 장기간 유지하다 보니 버스보다 운임이 낮아져서 경영회생의 가망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조차량을 1963년부터 들이기는 했지만, 차량부족 문제 덕에 1950년대에 도입한 당시에도 20년 이상 묵은 미제 중고차량은 물론이고, 1930년대 이전의 일제 차량을 거의 그대로 굴리다시피 하는 상황에선 뭐 노후화가 너무 심각하단 문제도 있었습니다. 뭐 여기에 레일도 굉장히 낡은데다, 전력설비 역시 갱신투자의 타이밍을 놓친 상황이었던게 아닌가 싶고. 

 일단 폐지는 하지만 이용객의 반발이 워낙 큰지라 일종의 떡밥 뿌리기를 쓴게 1967년에 발표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 이었습니다. 총 예산 17억원을 들여서 변두리 지역에 전차를 설치하고, 도심구간 철거에 4천 7백만원을 들이는 계획이었습니다. 일단 신규 노선으로 계획된건 다음과 같습니다. 

 ○ 신설동~수유리~창동 8.8km
 ○ 영천~불광동~갈현동 7.7km
 ○ 원효로~마포 1.7km
 ○ 왕십리~화양동 4km
 ○ 청량리~면목동 5.7km
 ○ 영등포~화곡동 10km 

그리고 철거구간은 ○ 서대문~종로(종각)~종로4가 ○ 종로~을지로 ○ 서울역~을지로6가 구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이미 1966년에 존슨 대통령 방한을 빌미로 ○ 남대문~효자동 구간을 폐지하고 도로포장을 해버린 상태였기에, 실질적으로 이 계획에 근거해서 잔존하는 구간을 묶어보면 동대문을 축으로 하는 동부 구간과 마포와 용산을 축으로 하는 서부 구간으로 양분이 되게 됩니다. 다른 기사에서는 이걸 고속노선, 즉 전용궤도를 쓰는 방식을 검토한 흔적이 보이고, 재원대책으로 동대문 차고부지 매각과 차관, 기타 보유재원을 쓰는 걸로 언급이 됩니다. 일단 이 계획만 보면 어떻게든 존속은 가능했을 걸로 보이기는 하는데, 뭐 그런거 없이 1968년에 전부 사업중지를 한걸 보면 노사문제에서 극단책을 쓰기로 했거나, 서울시의 재정압박이 워낙 심각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은 듭니다. 저 시기에 화곡이나 면목, 창동 이런 곳은 단독 택지로 개발을 추진하던 시대였던걸 생각하면 노면전차라는 지점에 매몰되지 않고 저규격의 근교전철로서 어떻게든 이어갔다면 싶지만 개발연간의 일이란게 그리 쉽게 말하긴 어렵기는 합니다.

 여하간 이 급거 폐지가 결정된 이후에 대체수단으로 지하철 이야기가 나왔을거 같지만, 실은 바로 간게 아니었습니다. 도중에 일본 등지로부터 제안을 받았던 시스템이 1968년에 갑자기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SS트램"이라는 물건입니다. 국내에서는 이때의 언급 이후 거짓말처럼 싹 사라져 버려서 이게 어떤 물건인지를 감을 잡지 못했는데, 마침 발굴한 사진이 앞머리의 저 사진입니다. 즉슨, 이 SS트램은 고무타이어 방식의 전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실은 삿포로 지하철에 쓰인 그 물건입니다. SS트램이라는 이름도 일본 업체, 당시 언급되는 이름은 히다치와 가와사키 정도인데, 이쪽에서 쓰던 상표명 비슷한거였지만 당시 관청가에서는 시스템과 상표명을 딱히 구분할만한 생각을 안했던지라 이게 언급이 된걸로 보입니다.

 SS라는 이름은 Silent and Safety 정도의 의미라고 하는 모양이고, 당시 보도에서는 이를 해석해서 무소음 안전 전차, 그리고 그나마 시스템으로서 명칭으로 단궤철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 고무타이어 방식의 전동차는 주행로 가운데에 돌출된 유도레일을 사용해서 조향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이런 호칭이 나온건데, 문제는 단궤철도라고 하면 보통 모노레일의 역어로도 쓰는지라, 여기에서 모노레일과 경전철의 혼동이  또 생겨나기도 했던걸로 보입니다. 이건 이후 90년대에도 계속 재탕되어 나오고 있으니 뭐... 60년대 말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말이 돌아서 온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당시 이 SS트램 방식으로 건설을 하는건 기본적으로는 고가철도를 염두에 두었던 걸로 보이며, 특히 시내구간은 청계천 축으로 청계고가도로에 같이 설치하는 것이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후 그대로 지하축을 관통하는 걸로 언급이 됩니다. 이 당시의 보도된 노선도는 여러갈래가 있지만, 아마도 전차이설계획과 맞춰서 본다면 아래 그림 쪽이 일단은 당시의 지하철 구상에 가깝지 않나 생각됩니다. 즉, 4개 노선에 도심관통은 지하철이라는 그림은 이때 이미 확정적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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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SS트램 안은 이후 자금조달 문제에 부딛히면서 표류하게 된걸로 보이는데, 일단 비슷한 고무타이어 지하철을 쓰는 프랑스와 신규개발 이후 판로를 찾는 일본을 통해서 차관조달을 조건으로 교섭을 하긴 했던걸로 보입니다. 문제는 당시 언급되는 재원규모의 문제인데, 차관 도입분 195억원, 내자는 239억원으로 총 사업비 434억원을 투입하는 걸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 돈으로는 종로선 정도도 겨우 건설할만한 돈이었기에 실제 가능했을까는 많은 의구심이 들지만, 이것 조차도 당시엔 어마어마한 예산규모였던 모양이라 결국은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나마도 외화교섭을 서울시가 직접하는 것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어서 아마 중앙정부와의 알력 문제도 있었을걸로 보입니다.

​ 이후에는 여러갈래로 노선 구상들이 엇갈리면서 다양한 노선도가 나돌게 되는데, 이때 돌던 게 순환선도 아니면서 한강 이남에서 서로 교차하는 4호선 그림이라던가, 이곳저곳에 소순환선으로 뱅뱅도는 노선들 그림이라던가 이런게 나온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의 기술자문단(JARTS) 안과 서울시 안을 조합해서 이른바 5호선까지 투입되고, 기존 전철과 직결하는 노선계획이 나오고 그게 일단은 2호선 착공 이전까지는 유효한 노선계획이 되었던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계획에 근거해서 철도청과 서울시 지하철이 직결하는 종로선 계획이 추진,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71년 착공 74년 개통이라는 꽤나 스피디한 추진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뭐, 정치자금 문제가 결부가 되었고, 개통시점에 사건까지 겹친지라 뒷맛이 개운치는 않긴 합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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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 경편철도의 실제.

14/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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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영상은 1차대전 당시 참전했던 미군의 군용 협궤철도의 영상입니다. 영상으로 남겨진 건 흔치 않은지라 일견의 가치는 있을겁니다.

 이런 경편철도류는 19세기 후반에 전쟁이 대규모 동원 형태로 돌아가게 되면서 줄곧 쓰이게 됩니다. 물론 군이 먼저 썼다기 보다는 광산 등지에서 쓰던 요령을 받아들인거긴 하겠지만, 대량의 탄약과 물자를 소비하는 대규모 동원이 일상화되면서 나폴레옹 전쟁 즈음에도 이미 한계가 보이던 노획과 현지징발에 의존하는 작전은 거의 불가능해지고, 모든 물자는 후방으로부터 실어나르게 되는 병참 전쟁이 됩니다. 

 이 와중에서 왜 경편철도가 쓰이게 되는가 하면, 일반적인 표준궤 철도는 너무 크고 육중한데다, 투입되는 자재나 인력의 소모 역시 방대한데 비해서, 전쟁의 진척은 그 이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에 철도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도로용 크레인으로도 100톤짜리 물체를 들어올리고, 트레일러 한대가 50톤쯤 되는 시대와 달리, 19세기 말엔 자동차는 매우 귀중한 기계로 내연기관이 달린건 그야말로 첨단기술 집약체였고, 철도가 아니라면 말 두마리로 몇 톤을 겨우 운반하는 마차와 100kg 정도를 나르면 매우 훌륭한 노새 등짐에 의존하는게 당연한 시대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표준궤 철도와 그 말단의 소운송 간의 단차가 너무나도 커졌고, 이를 메꿀 수단으로 50~70cm정도의 궤간을 쓰는 경편철도가 투입되게 된겁니다.

 영상 초입의 묘사를 보면 병사 한명이 목침목을 들어다 깔고 몇 사람이 달려들어 레일을 놓고 개못을 박아서 궤도를 부설하는게 보일겁니다. 표준궤라면 너무나 조악한 선로라서 차가 자빠지고도 남을 선로지만, 수 톤짜리 협궤 기관차라면 그런대로 굴러갈 수 있는 선로가 됩니다. 물론 저거 외에 아예 제대로 조립해 놓은 레일과 침목 결합체인 궤광을 운반해서 현지에서 인력으로 정리한 노반 위에 척척깔고 이음매를 체결해서 굴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일반철도라면 크레인으로 이 궤광을 들어야 하겠지만, 협궤다 보니 그러지 않아도 충분한 경우랄까 그렇습니다. 기관차 역시 평판화차로 운반 가능한 정도의 중량을 가진 것으로, 수 톤에서 많아야 10~20톤 정도의 물건으로 현장에서 가설한 기중기나 보선/구원용 증기 크레인으로 들어다 하역하는게 가능한 수준의 것이 쓰였습니다. 

 저렇게 부설하는 경편철도는 대개 기성 철도의 종단점에서 전선 뒤의 보급거점까지의 수송구간을 담당하는게 보통이어서, 일본군 철도연대의 경우엔 1개 대대가 약 45km 정도 구간을, 이런 대대 4개와 재료창을 예하에 두는 1개 연대는 경편철도의 수송한계라 말해지는 180km 정도의 구간을 커버하게 됩니다. 이건 아마도 유럽측의 군용 경편철도에서도 큰 차별이 없을건데, 이런 운용개념을 독일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일본군이 배워왔을거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편철도를 180km를 직선으로 쭉 뽑아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철도종단에서 2~3개의 지선 형태로 뻗어나가는 모양새가 되기는 할겁니다. 전선으로는 식료품이나 탄약, 무기, 병사들을 수송하고, 후방으로는 반대로 부상자나 휴가자를 실어오거나, 전쟁에서 발생하는 여러 폐자재를 회수해 오는 식으로 동작하게 될겁니다. 만약 전황이 나빠진다면 장비와 병력을 철수하는 수단이 될거고 말입니다.

 보통 경편철도는 굉장히 가설과 철거가 쉽기 때문에, 전선이 고착된 동안에 기존 철도종단에서 전선 뒤의 적 곡사포가 닿지 않을만한 지점까지 철도를 복구해 전진하면서 점차 경편철도 구간을 단축 해 나가게 됩니다. 아예 경편철도가 깔린 구간을 그렇게 대체해 갈수도 있지만, 대개는 파괴당한 철도를 복구해서 전진하는 형태가 될겁니다. 그렇게 전진해 나가면서 더 이상 수송용도로 쓰지 않는 경편철도를 다시 새로운 종단점에서 전방 보급거점으로 전개하는 식으로 움직히게 될거고 말입니다. 1차대전까지는 이런 양상으로 전쟁이 전개될 수 있었는데, 군대의 전진 속도는 도보 속도를 넘기 힘들어서, 하루 전진 속도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나가더라도 수십km 정도, 만약 전선이 형성되어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지경이 되면 그야말로 하루 100m도 못밀고가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루에 3~4km씩, 열흘 정도에 40km를 부설하는 경편철도면 느리긴 해도 전선의 유동을 그나마 따라갈 수 있는 물류 수단에 근접했을겁니다. 

 2차대전쯤 되면 항공기와 화포, 자동차의 발달로 전선이 그야말로 다이나믹하게 요동치게 되고, 1차대전과 달리 후방이 전선과 명확히 분리되지 못하는 그런 환경이 됩니다. 하루 100km씩 기동하는 기갑을 경편철도의 부설속도로 따라갈 수 없는건 물론이거니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동차가 이미 어지간한 협궤철도의 속도나 수송력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 표준궤 기반의 철도 수송은 매우 긴요한 수송수단이었기는 합니다만, 여기에서 전선까지의 수송은 이미 협궤철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다이나믹해지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1차대전 이후의 경편철도 붐이 분 건 사실 군대에서 방출된 이런 막대한 자재들과 차량들이 있어서라고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전쟁을 위해서, 또 소모를 각오하고 열심히 찍어놓은 물자들이 쓸데가 없어지니 민간에 싸게 불하되었고, 이런 헐값의 기재가 풀리다 보니 이런저런 지선망에 협궤를 가져다 대는게 싸게 치이게 되는 효과가 생깁니다. 마침 전쟁 이후 호경기 덕분에 민간에 자본도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러나, 그런 붐은 10년여 뒤에 당시 대공황이 몰아닥치고 미국을 필두로 자동차, 주로 버스의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느려빠진 협궤로는 감당이 안되게 되어 1930년대부터 이미 망하는 노선이 속출하고, 전쟁으로 인한 물자난과 인력난으로 운휴가 속출, 이후 회복되지 못하고 폐업이라는 루트로 대부분이 빠지게 됩니다. 

 청일전쟁 당시의 군용철도는 사실 이런 경편철도가 아니라 마차철도나 인력궤도였을 가능성이 다분하기는 합니다. 다만, 이게 갑툭튀한 무엇이기 보다는 이미 유럽등지에서는 곶잘 쓰였던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라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일단 보스니안 게이지가 1870년대의 창안이고, 이 시대가 협궤 유행이 유럽에서 한번 돌던 시대였기도 하니 말입니다. 

P.S.: 경편자재들이 또 기여한 부분이, 대규모 토목공사이기도 합니다. 특히 장대터널이나 댐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경편철도 자재들이 흔해지면서 과거에는 자재와 인력의 투입이 어려워서 못하거나, 또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사토(불필요한 흙과 돌)들을 반출하기 어려워서 하기 어렵던 공사들이 대거 경제성을 가지게 된 면이 있습니다. 뭐 전쟁의 대규모 동원과 병참을 해본 경험이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하게 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만, 철도같은 메가프로젝트는 어떤의미에서 전쟁과 양면을 이루는 부분들이 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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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철도 논란.

12/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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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인선 이전에 평양-진남포간의  평남선 철도가 최초라는 떡밥이 나돌아서 여기에 대한 논란이 있는 모양입니다. 역사 쪽을 다루는건 논쟁의 연속인 만큼 함부로 말하기는 매우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자료 정리 차원에서 한번 정도 적어봅니다.

 저 논란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한국철도사 1권 49페이지에 언급된, "즉, 1895년 2월 일본군에 의하여 21吋(인치)의 일본식 철도 선로가 진남포와 평양 간 55哩(마일)에 부설되었다고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근거로,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구한말의 미국인 호레이쇼 뉴튼 알렌의 일지 66페이지라고 주석을 달아놓고 있습니다. 한국철도사 자체는 60년대에 과거자료를 집대성해서 74년에 겨우 1권이 나온 책이고, 나름대로 당시 보유한 문헌근거를 털어서 저술한 책인 만큼 신뢰도를 의심할 것은 없지만, 저 기사의 언급을 보면 명확한 근거가 없이 알렌의 언급이 전부라서 반신반의하는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문언 그대로 읽는다면, 경인선보다 4년 7개월이 빠르다고 해석할 수 있기는 합니다. 다만, 여기서 함정이 몇 개 있는데, 일단 저게 새로 노반을 닦아서 기관차가 운행한 철도였는지, 아니면 단기간의 개업을 우선해서 도로 등을 활용해 가설한 궤도인지, 더 극단적으로 평양이나 경인선 병행으로 일시 영업을 했던 수압식의 인력 궤도였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만약 수압식 궤도라면 이건 철도라고 할 수 없는 물건이고, 도로에 가설한 궤도라면 대개 말이나 노새를 써서 견인하는 마차철도류의 시설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쿄에서 마차철도가 개업한게 1882년인지라 일본에 동종의 시스템이 없던것도 아닌지라.

 이 부분을 일단 스킵하고 넘어가서 증기동력으로 운행한 철도라고 인정하더라도, 언급된 21인치 궤간이라는 것의 정체가 모호해 집니다. 실은 21인치, 533mm라는 궤간은 실은 굉장히 마이너한 궤간이라서 일본의 경편철도 중에서도 채용례가 안보이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저 당시의 극동지역 미터 이하 협궤간 철도는 군이든 정부든 누가 수입해 와서 깔거나, 그걸 다시 불하받아 설치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게 아니라면 열강들이 근처 식민지나 군에서 쓰고 있어서 땡겨올 여지가 있는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도 533mm 궤간을 쓰는 케이스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언급한 궤간의 정체를 따져봐야만 하는데, 개인적으로 가능성이 있는건 610mm 궤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본군이 청일전쟁 직후에 창설한 철도대대에서 영국 바그널(W.G. Bagnall)의 610mm 협궤 기관차 2대를 구입한 전적이 있는데, 이게 실은 전쟁당시의 급거 도입해서 인수한 것이 아닌가 라는 가정이 가능할겁니다. 610mm 궤간이라면 21인치가 아니라 2ft.(피트)로 표기하는데, 이를 잘못 기입 또는 독해해서 21인치가 된게 아닌가 라는 의심이 있습니다. 이후 동일 궤간을 일본 국내의 경편철도가 쓴 예도 있거니와, 이후 러일전쟁에도 사용된 전력이 있는지라 정말로 증기 철도가 깔렸다면 이것 이외에는 딱히 대안이 될만한게 없다시피 합니다. 뭐, 유럽 열강들의 전선용 군용철도들 대개가 600mm~762mm 범위 내에 들어가기도 하는지라 열심히 따라하던 일본군도 별다른 고민을 했을리가 없고.

  만약에 이 2피트 궤간 철도를 부설해서 정말로 증기차로 운영했다 해도 이것을 조선 최초의 철도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 실은 해당 기록의 말미에 '후일 철거 이전됨'이라고 언급되고 있어서, 전쟁 기간 중의 급거 설치했다 철거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게 맞을겁니다. 이렇게 부설된 철도는 그야말로 간신히 운행할 수 있는 수준의 것으로, 속도는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선형이 불량하고 교량 등의 토목구조물을 최소한도로 설치했을 가망이 높아서 영업용 철도로 쓰기에는 일단 부적합하고, 종종 위험하기까지 했을거라 봅니다. 

 물론, 이런 군용 가설철도를 가지고 여객을 승차시키는 일을 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경우엔 이른바 '편승'이라는 개념을 일본에서 씁니다. 이건 제대로 된 운수영업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직원이나 군인이 아닌 관계 일반인을 편의적으로 태워주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물론 드물게 돈을 받고 태우는 경우가 있지만, 그 대가는 매우 약소한 정도고 대개 "사고시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식의 면책을 걸고 태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당연히 정규 영업, 즉, 공중을 대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고 볼 수 없다 하겠고, 따라서 국내 철도사를 바꿀만한 사건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비슷한 예가 중국에도 있어서, 상해에 설치되었던 우송(吳淞) 철도라는 협궤철도에 대해서 비슷한 논쟁이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청국 정부에 도로를 설치한다고 기망하고 임의로 부설한 협궤철도인데, 결국 이후에 문제가 되어서 1년만에 폐지, 청국 정부가 매입해 철거해버린바 있습니다. 중국철도의 기원은 이것 보다는 카이핑 탄광철도로 두는데, 이게 이후 중국 철도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요소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는데다, 후대에도 노선이 계속 이어져서 경봉선 철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표준궤를 비롯한 여러 건설의 표준을 확립하였고, 지금까지 노선이 계승되어 이어진 경인철도가 한국 최초의 철도라 보는게 상식적이라 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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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한국철도사 발간.

7/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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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20년쯤 전에 있던 신한국을 건설하시겠다는 분들의 철도사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제목이지만, 일단은 공적으로 간행된 통사가 20년 만에 출간되는건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라 할겁니다.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는 기원론을 1876년까지 끌어올리는 이야기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게, 구 한국철도사에서도 그 부분은 꽤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1880년대의 조미간의 교섭 건이 더 중요한 내용이 많이 있고, 이쪽을 파보는게 차라리 의미가 깊을건데 얼마나 반영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사안을 제껴두고라도, 1896년의 겸이포 군용철도를 기원으로 볼 것인가, 1899년의 경인철도를 기원으로 볼 것인가, 경인철도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등 다룰 부분은 기 간행된 자료에서도 상당히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이걸 얼마나 담아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일제부터 1960년대까지의 "흑역사"들이 얼마나 담겼을지도 기대가 됩니다. 이 시기는 자료가 정말 빈약하고, 사업을 시도하다 실패하거나 일제가 하다 만 설비를 재활용한다거나 하는 식의 변천이 많고, 기술면에서도 그렇게 된게 많습니다. 또한, 좌우대립 과정에서의 갈등같은게 사실 민감한 사안이면서도 꽤 중요한 이슈인데 어떻게 담았는가를 볼 필요는 있을겁니다. 공식 간행사는 이런 사안들을 얼마나 가감없이 담아내냐가 관건이라 할거고, 또한 문헌자료 외에 구술이나 유물, 통계같은 다양한 정황자료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할건데 얼마나 이루어졌을지도 관심이 간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개적으로 보도자료를 뿌린지 이틀 정도 지났는데, 그 한국철도협회의 사이트에서는 페이지만 설치되어 있고 열람이 안되고 있는 사안이라 할겁니다. 사이트는 심지어 브라우저에서 도태된 플래시 메뉴를 쓰고 있기까지 해서 열람 자체가 어렵게 되어 있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고 말입니다. 이건 공개의 의지가 없는건지, 아니면 "기술적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이야 전자적 배포를 하는게 흔해지긴 했지만, 일반서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지 않은 점은 상당히 아쉽다 하겠습니다. 

P.S.:11월 7일 10시 반 부터는 다운로드가 가능해 지긴 했습니다. 에러 다발이기는 합니다마는. 일처리가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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