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바로 1930년대 조선해협 해저터널이었던 것입니다. 옆의 영상은 1939년 3월 18일자 총독부의 어용 한글 신문인 매일신보의 보도문으로, 전혀 검토된 바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그 반론 정도쯤 되는 이야기라 할겁니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네이버 신문 아카이브에서도 관련 내용이 제법 나오고 있으니 일제당시의 구상이 "사실무근"이라고 하기는 좀 나아간 부분은 있습니다. 해당 보도의 내용은 새로 임명된 일본 본토의 철도상(철도성의 장관) 마에다 요네조(前田米蔵)가 새로 취임하면서 중의원의 대정부질의에 대한 대답으로 해저터널의 건설계획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는게 요지입니다. 마에다 대신은 1936년에도 1년간 재임했다가 물러났고 이후 39년에 다시 취임한 사람이고 이전에는 상공성의 대신으로 재직한 경력까지 있으니 부내의 논의를 모르거나 무시하고 갑툭튀로 저런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기도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계획이라기 보다는 구상 정도, 적어도 이런걸 해볼까 정도에 그치는 이야기에 가깝기는 할거라 생각은 되고 여타 자료에서도 그정도의 취급에 가깝기는 합니다만, 아예 꿈같은 이야기 내지 몽상 정도로 취급하는 것 보다는 계획서 하나 정도를 내놓아 봄직한 정도까지는 진행을 했던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후 철도성에 재직 중이던 토목 및 지질 전문가인 와타나베 토오루(渡辺貫) 박사가 이 계획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40년 이후의 보도 자체가 없는지라 실제로 얼마나 진행이 되고 어떤 내용을 다뤘는지는 모호합니다. 뭐, 실제로는 예정지역의 지질탐사 일부 외에는 거의 이뤄진게 없었을걸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
철도 부문 역시 이런 상황에 끌려가는 판이었는데,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중앙선(당시 개통 후의 경경선)이 경부선의 내륙 백업노선이라는 이유로 급거 추진이 된다거나, 북한지역의 내륙종관노선들이 난공사에도 불구하고 남한 지역의 계획선보다 우선시되는 등, 당시 일제 육군의 입맛에 맞도록 돌아가는 흐름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물동량 문제가 생기면서 경부선과 경의선의 복선화가 당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었는데, 복선화시의 개량규격을 R=600m(현행 110제한, 일제당시 갑선 규격 기준 90제한), 부득이한 경우 R=400m(현행 90제한, 갑선 기준 80제한)까지, 구배 역시 10퍼밀 이하로 선형을 죽죽 펴는 공사를 합니다. 실제로는 R=300커브들이 도처에 남아있었기는 한 모양이고, 남성현 터널 전후의 13퍼밀 구간도 그냥 남아있는 등 제대로 완수가 되지는 못하기는 했습니다만서도.
이렇게까지 규격을 올린 배경에는 수송력 강화라는 이유도 있지만, 종종 언급되는 내용이 일본 본토에서 추진하던 탄환열차계획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건 조선교통사에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단순히 속도경쟁 정도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물류의 일원적 수송이라는 이유 역시 다분했다고 봐도 됩니다. 당시 탄환열차계획은 1950년 경에 완공을 목표로 했었고, 일단 수송은 고성능 증기기관차에 의한(도쿄 인근은 3kV 직류 전기운전 예정이었지만) 고속운전이 전제가 되어 있었고, 병행해서 화물의 수송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연계해 수송하기 위해서 여러 규격들을 이 탄환열차계획의 규격을 참고해서 끌어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여객만 생각한다면야 규격을 맞추는데 크게 연연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시모노세키에서 배로 부산까지 도항하는건 당대의 통례였고, 이렇게 다니면 환승은 필수인 셈이니 맞추는건 그냥 기술자의 자기만족 정도 밖엔 의미가 없을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탄환열차가 그랬듯이, 군수화물 수송의 문제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군용 화물류를 환적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노동력의 투입과 함께 막대한 항만 야적시설이 부대되고 이러고서도 시간 지체, 기밀 누설, 또한 방어와 안전 관리 면에서 약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요새, 요항으로 지정해 사진촬영이나 지도 작성까지 금지하던 당시의 군부의 행태를 생각하면 이걸 용납하긴 좀 그랬을겁니다. 그래서 탄환열차로 궤간의 일체화와 규격 일치를 시켜서, 아마도 시모노세키, 이후 검토범위로 하카타와 다케히사(시모노세키의 북쪽, 실제 축조되진 않은 항만) 항을 통한 철도항송, 지금으로 말하면 열차페리를 통해 화차를 직송하는 걸 계획했을걸로 보입니다. 열차페리 자체는 이미 간몬, 우고, 세이칸 등지에서 잘 써먹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여기도 아예 표준궤판을 밀어넣고자 했었을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봐야할건 열차페리가 가진 취약성입니다. 경부선이 해안으로부터 공격당해서 두절될 것을 우려해서 내륙에 경경선을 경부선 규격을 준용해 추가로 지어올리게 하던 군부, 주로 육군의 사고방식을 감안하면 열차페리는 언제든 상대의 통상파괴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일본은 개항 이래로 영국, 미국의 해양력을 두려워했고, 1차대전식의 전함, 경순양함에 의한 통상파괴 압력을 실제로 목도했던 바가 있는지라, 전쟁에서 가장 크리티컬한 해운루트인 대한해협(당시의 조선해협, 현해탄)의 방호와 함께 유사시의 대안 역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해군을 동원하고, 쓰시마와 이키, 부산에 1920년대 기준 최강의 함포이던 16인치 포를 끌어다 포대를 짜 올려도, 잠수함의 침투나 기습적인 기뢰 부설 등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어 상시 제해권을 유지한다는 보장을 하긴 어려웠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육군과 해군은 국가 대전략에서부터, 예산, 인력을 놓고 늘 갈등을 하던 관계기도 합니다. 해군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데다, 저런 반목의 관념이 박힌 육군에게 해군에게 의존하는 상황은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거라는 건 쉽게 생각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자기 통제 하에 둘 수 있는, 해군 및 해운에 의존하지 않게 인프라를 갖춘다면 그게 많이 비싸고 어렵더라도 해볼만 하단 생각을 했을겁니다. 1939년에는 이미 중국에서는 이미 종전은 어렵고 끈임없이 전선이 확장되어 가서 군수능력이 허덕이고 있었고, 미국은 무역제재를 점차 조여오기 시작했으니 이 물자수급과 병참 유지의 획기적 대안으로 저걸 안 쳐다볼 수가 없는 상황으로 점점 몰려가게 됩니다. 물론 해저터널 공사는 워낙 막대한 노력이 들어가는 걸 공사중인 간몬터널로 체감하고 있긴 했을겁니다마는, 대미 개전이든 대소 개전이든 언젠간 전쟁을 하겠단 생각이 만만하던 당시에는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했을겁니다. 탄환열차 계획도 1944년에야 사업 중단이 결정되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막대한 항만투자가 있고, 수송과 하역에 컨테이너가 대량으로 쓰이면서 환적이나 항만처리의 부담도 크게 줄어든데다, 과거와 달리 한국과 일본은 별개의 국가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일제 말기보다는 기술의 발전이 현저하니 꿈같은 이야기 취급이던 당시보다는 건설의 기술적 가능성은 확실히 나아지긴 했습니다만, 이걸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당시보다는 더 모호하고 생각할 여지가 많아졌기도 합니다. 당장에 경제, 재무적으로는 가능성이 확실해서 쌉가능이라고 하더라도, 20년 쯤은 걸릴 사업이기도 한데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철도망에서 저걸 받아낼 아무런 준비나 검토도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뭐 될리가 없는 그냥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면 그만이기는 합니다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