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영국 철도 이야기를 할때 1994년의 민영화 자체만을 두고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반대측이든 찬성측이든 크게 예외가 없이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이지만, 사실 왜 민영화까지 이르게 되었는가의 컨텍스트는 종종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깊은 논쟁이 어떤 기원이 있었는가도 대개 깊게 모르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가 언급이 적고.
영국 철도의 경영방향에 대한 논란은 1921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세기의 영국철도는 그야말로 철도매니아의 시대였습니다. 그 S차에 열광하는 그거 말고, 주식시장에서 미친듯이 철도종목에 투기하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날뛰는 자본을 바탕으로 별다른 체계적인 철도망 전략 없이 돈이 됨직한, 돈이 되지 않아도 그럴싸한 노선이라면 마구잡이로 건설이 이루어지는 시대였습니다. 물론 그만큼 망해 자빠지는 노선도 나오고, 증시의 부침, 즉 버블의 향방에 따라서도 자빠지거나 착수도 못하는 노선들이 곧잘 나오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래서 20세기를 맞이한 철도회사는 100여개 정도였는데, 1921년에 이들 철도의 효율화와 경영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이른바 빅4라 불리는 4개 회사로 대합병을 시키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흔이 이것을 "대합동"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일본도 비슷한 정책을 1930년대 후반에 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영국 철도는 전시 경제를 지탱하는데 있어 상당한 역할을 합니다. 일단 군수공업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석탄과 전기가 필요하고, 생산된 물자를 운반하는 교통이 필요하며, 그 산업을 돌리기 위한 통근자들이 필요했는데, 이걸 책임진 것이 철도였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고 보니, 교통의 체계성이나 통합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또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철도 시스템의 복구와 경영안정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당시 노동당 정부는 1948년에 국유화를 단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유화된 철도는 1950년대까지는 상당히 잘 돌아갔었습니다.
그러나 1953년에는 상각후 적자가, 1955년에는 상각전 적자 수준까지 떨어지게 되고, 1962년에는 1억 영국 파운드의 적자에 달하는 등 경영상태가 급속히 악화됩니다. 시설투자와 고용은 계속 늘어나고, 도로교통의 대두로 수요감소가 일어나는데다, 운임은 억제되면서 적자는 지속 악화를 겪게 됩니다. 이미 적자계상을 당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대화 계획이 추진되고, 개선대책들이 들어갔지만 백약이 무효라서 1962년의 저 사태를 얻어맞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영국 국철 위원회(British Railway Board)에 의한 보고서, 그 위원장 리처드 비칭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이른바 "비칭 보고서"입니다.
비칭 보고서의 기본적인 논리는 굉장히 간단한데, 영국의 철도영업거리 중 60%가 수송밀도 1만명 미만의 이른바 채산성이 의심되는 노선이며, 그중 36%는 심지어 2000명 미만에 불과했는데, 이들 노선은 심지어 여객 인거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단 1%에 불과할 정도이므로, 노선의 대대적인 정리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노선을 살리고, 어느 노선을 죽일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수입 대비 비용을 비교해서, 적자선들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을 했습니다. 이는 역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로 접근해서, 당시 실적치를 기준하여 역당 약 2,500영국 파운드의 비용이 유지에 들어간다고 간주를 해서,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역들, 2500파운드 이하의 수익을 내는 전체 역 숫자 중 약 41%, 수입 비중에서는 단 1%밖에 안되는 역들을 위시하여 다수의 역을 정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근거하여 보고서는 비칭 보고서가 "정리"해야 한다고 규정한 철도는 노선 연장의 30%에 달하는 약 5천 마일의 철도노선, 역은 전체의 절반 이상인 2, 363개 역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잔존한 철도에서도 다시 효율화를 통해 15%에 불과한 3천마일까지 축소하되 이들은 철저하게 현대화된 철도로 개량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중에 추가로 제기한 바 있습니다. 또한, 보고서에서는 화물의 정리도 주장이 되었는데, 재래식 수송인 각역정차식의 구간화물열차의 전폐와 직행열차 위주로의 전환, 소포나 소화물을 포함해서 화물취급역을 전국 100개 정도의 주요 거점역으로 통폐합하고, 구식 화차를 3년 내로 전부 도태시키는 등 화물부문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차량 역시 증기기관차 4,250량을 디젤기관차 3,750량 정도로 대체하며, 파동수송용 객차들의 대거 폐지, 그리고 증기여객열차를 디젤동차로의 전환 같은 대규모의 축소와 전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파천황에 가까운 주장이었고, 당대는 물론 이후로도 엄청난 논란을 끌고왔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비칭 보고서는 실패한 보고서가 되었습니다. 일단 오로지 수지구조만을 분석의 틀로 잡은데서, 그로 인한 편익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또한 전국 획일적인 기준으로 작성되다 보니 지역의 실정, 도로의 불비나 혼잡, 지역 산업의 쇠퇴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고 무조건 돈안되면 날리는 결론이 되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또한, 정작 보고서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적시한 불투명한 운임 결정 문제나, 과거 대합동이나 국유화 과정에서 누적되어 왔던 회계적 부실과 불투명성에 대해서도 별로 다뤄지진 못한채 그냥 사업정리만 열을 올리다 보니 잘 되기도 어려웠고. 뭐 이런거야 늘 개혁에 따라오는 반동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보고서에서 1970년에는 대부분의 적자가 해소될거라고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건 요즘 말로 "롱테일"이라 할만한 저 30%의 노선, 50%의 역들은 그야말로 몸통이 아닌 꼬리에 불과한 존재들이어서, 날리건 말건 결국 비용 구조에 미치는 영향 자체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적자가 나기는 나지만, 어차피 대개는 시설규격이 극히 낮고 보선소요도 적은데다 역도 다들 별게 없다시피한 그런 설비가 되어서, 총량으로 본다면 그게 본질이 아니었던 셈이랄까. 반대로 런던 근초의 근교 노선이나 몇몇 어중간한 간선 노선들은 실제 이용밀도 같은걸로 보면 비교적 양호했고 영업계수로만 보면 그런대로 버틸만 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여기가 적자의 "몸통" 그 자체였달까 그랬습니다. 역으로, 저런 자잘한 지선들을 섯부르게 쳐낸 결과, 환승이나 중계 이용으로 간선철도를 이용하던 사람, 물자들이 대거 자동차로 유출되는 결과를 불러들여서, 수요 감퇴와 적자가 심해지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64년에 보수당에서 노동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이 인기없는 비칭의 도끼질은 1968년에 새로운 교통법이 제정되면서 종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칭의 도끼질에 희생된 노선들은 이미 시설이 철거되고 토지가 처분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들을 대거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몇몇 운좋은 노선은 80년대에 부활하기도 하지만, 이건 예외적인 경우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1968년의 정책 변경으로 사회적 가치가 있는 노선들에 대해 보조금을 적극적으로 투입하여 유지하는 사회적 철도라는 개념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수송량의 반전이 일어나지는 못했고, 또한 오일쇼크 등 대외적 요인과 경제의 비효율, 노후화 등이 겹쳐 긴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수요 역시 죽죽 밀리게 되고, 우유 도둑...아니 마가렛 대처의 "사회따위는 없다"는 강경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노출되어, 1994년의 보수당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민영화 정책은 비칭 보고서 보다도 좀 더 날림이었기 때문에, 레일트랙 파산이나 동해안선 프랜차이즈 문제 같은 굵직한 문제가 잊을만 하면 따라왔고, 비용효율성은 더 악화되고 운임이나 서비스 품질, 혼잡 등에서도 늘 악플이 따라붙는 그런 방향이 됩니다. 이용객은 꾸준히 늘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정부의 재정지출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고, 운임 부담 역시 같이 늘어나는, 즉 산업의 효율성이라는 문제에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겨진 그런 상태가 지속된 모양이랄까. 결국 영국 철도는 비칭 보고서를 밀어붙인 그 보수당 정부에 의해서 도로 '영국국철'로 회귀하기 시작한 것이 근래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비칭 보고서는 욕을 엄청나게 먹었긴 하지만, 거기서 언급된 여러 기술적인 개혁 방향들은 다른 나라에도 많이들 파급되었고 영향을 미친 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철도청 이래의 정책 추진 과정들도, 비칭 보고서에서 천명한 여러 방향들, 화물의 직행화나 증기차량의 도태, 디젤동차의 보급 등은 꽤 이래저래 따라갔고, 비채산 노선이나 역의 삭감들 역시 70년대 이래 꾸준한 방향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엔 대외원조와 결부되어 경영진단의 형태로 이런저런 자문이 많이 이루어졌고, 그게 정책에 반영되기도 했는데 그런 영향이 있었다 해도 틀리진 않을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과잉투자된 거대 네트워크의 구조개혁 논리는 철도청에겐 많이 이른 이야기였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도 많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