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일은 KTX의 운행개시일입니다. 그래서인지 18주년 기념 기사들이 많이들 눈에 띕니다. 다만, 여기서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되는 문구 중 하나가 "세계 다섯 번째 고속철도"라는 부분입니다. 이 근거가 일본의 신칸센, 프랑스의 TGV, 독일의 ICE, 그리고 스페인의 AVE 까지를 잡아넣어 이야기를 하는 부분입니다. 정작 이건 잘못된 표기인데, 일단 프랑스 기술 기반의 사업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채널터널을 다니는 유로스타(1994)와 벨기에의 HSL-1(1997)이 있는 만큼, 이미 KTX개통 이전에 2개 국가가 더 개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국가는 프랑스 합작의 국제선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니 프랑스의 것으로 카운트를 했다 쳐서 뺀다 했을때도 틀렸는데, 바로 이탈리아가 말 그대로 "없는 셈" 쳐놓은 숫자라는 점에서 전혀 안맞는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탈리아를 왜 누락시켰는지는 미스테리 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사실 이탈리아의 디렛티시마(Direttissima, 약칭 DD) 선로는 일종의 최단선이라는 용어 개념으로 쓰이고 별도의 고속선이라는 뉘앙스가 좀 약해서, 프랑스의 LGV나 독일의 SFS(내지는 HGV-strecke) 식의 고속선 컨셉과 매칭이 안되는 탓이 있어서인가 싶기도 하고, 또 다른나라 처럼 전용 차량을 부르는 TGV나 ICE같은 용어없이 운용구간에 딱히 연동되지는 않고 쾌속전동차라는 의미의 ETR(Elettro Treno Rapido)을 쓰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는데, 정작 이탈리아가 유럽식 고속선 컨셉의 원조에 해당하는 걸 생각하면 사전조사의 부족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디렛티시마라는 철도용어 자체는 심지어 2차대전 이전인 1920년대에 쓰인 용어라고 합니다. 이 당시엔 말그대로 직선화 개량선 정도의 의미로 쓰였던 거기는 한지라, 지금의 고속선 컨셉과는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걸 빼고 보더라도 고속선으로 취급되는 첫 디렛티시마선인 피렌체-로마 DD는 1968년 예산배정이 개시되어 70년에 착공, 그리고 1977년에 주요 터미널 역 정비와 함께 로마에서 피에브 까지의 1차 구간 138km가 운용된 바 있어 유럽에선 첫 개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노선입니다.
이 최초의 디렛티시마인 피렌체-로마간의 설계규격을 보면 구배는 최대 8퍼밀(!!), 그리고 곡선반경은 3000m이며, 통상적인 고속철과 달리 3000V 직류 전압을 사용하는 좀 이례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실은 최초 개통 당시에는 기존의 전기기관차를 사용한 특급열차를 운행시켰다고 하며, 이후 ETR시리즈 전동차나 국제선 특급에 해당하는 TEE 열차들이 다녔다고 합니다. 실은 개통 당시의 최고속도는 180km/h까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5년에는 200km/h운전이 개시되었습니다. 현대적인 고속철도의 최고속도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당시 기준이었던 200km/h이상으로 운전하는 철도라는 기준은 1985년에 충족을 했던 만큼, 이 기준으로도 최소 세계 3번째의 고속철도 운용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기준은 아닌 셈입니다. 애초에 신칸센도 200km/h이상의 운전이 실시된건 64년이 아니기도 했는지라. 현재는 250km/h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하고.
터널공사 문제로 계획선 변경이 있었지만 이후 사용개시 구간을 늘려서, 1986년에 2단계 개통을 보고, 최종적으로 1992년에 계획선 전부를 개통을 합니다. 이 디렛티시마 선은 유럽식의 고속철도 컨셉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과언이 아닌 노선인게, 일본의 신칸센과 달리 이쪽은 고속선 구간에 역이 전혀 없이, 연결선을 사용해 열차가 디렛티시마선을 경유하여 속달운전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이 되고, 정차역은 기존선에 직결해서 시내의 거점역에 진입하는 식으로 운영됩니다.
구체적으로, 디렛티시마의 경우 주요역이라 할만한 피렌체와 로마에서는 완전히 기존선 공용을 하지만, 나머지 도중구간에는 오로지 연결선 경유로 기존선을 타야만 정차가 가능하며, 무정차 통과할 경우엔 계속해서 디렛티시마선을 타고 진행하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이 됩니다. 그야말로 고속도로와 같은 컨셉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고 해야할겁니다. 프랑스나 독일은 이런 컨셉을 좀 완화해서 고속선상에 도중역을 두거나, 기존선과 병행해서 저속으로 운행하는 병행선을 두기도 하고, 이후의 다른 디렛티시마는 도중역을 두기도 하지만 원조쪽은 좀 극한 컨셉 그대로랄까 그렇습니다.
이후 이탈리아의 고속선은 2005년에 로마~나폴리(전구간은 2009년), 2006년 토레노~밀라노(역시 2009년 전구간 개통), 2007년에 파두아~베네치아, 2008년에 나폴리~살레르노, 밀라노~볼로냐~피렌체, 2016년에 밀라노~브레시아 등 지속 건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1차 개통 이후 장기간 건설이 없던 건 정치적 환경이나 사업규모 같은게 많이 걸렸으리라 생각은 되고, 또 디렛티시마라 불리는 피렌체~로마는 비교적 험한 산악구간이라 기존 철도의 효율이 썩 좋지 못한데다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남북격차 해소라는 배경까지 있어서 일찌감치 건설이 된 감도 있을거라 보입니다.
약간 곁다리성이 들어가는 이야기지만, 저 디렛티시마 경유로 운용된 차량에는 TEE '세테벨로(Settebello)'로 운영된 이 ETR300 전동차가 있습니다. 차량의 최초 제작은 무려 1953년, 이후 1959년까지 제조된 차량으로, 제조당시엔 160km/h, 이후 1969년에 전동기와 대차를 교체하여 200km/h대응으로 운전성능을 갖추게 됩니다. 물론 카더라로는 200km/h를 정규 시각표에서 내지는 않았다고도 합니다마는. 디자인이나 도색이 어디서 겁나 많이 본 거 같지만, 뭐 더 말은 안하겠습니다. 이후 진정한 고속선 대응이 가능한 직류3000V 차량 ETR500이 1992년부터 투입이 되었고, 이쪽은 300km/h 운전까지 가능해서 선로성능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었던 모양이긴 합니다. 즉, 차량측의 대응이 늦었다고 치부하더라도, 1993년 쯤에는 200km/h이상의 운전이 확실히 가능했을거라 봐도 틀리진 않다고 생각됩니다.
신칸센이 '재래선과 완전히 분리되어 운영되며, 기술기반도 완전히 별도인 독자적인 철도 시스템'이라는 컨셉을 강조하는데 비해서, 유럽계 고속철도는 '기존선의 고도화 확장판' 으로서, 기존 철도와 기술적인 호환성을 가지거나 최소한 고속철도 쪽에서 기존선 방향으로의 하위호환이 가능한 체계인 것은 여기에서 유래가 되었다 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신칸센 쪽의 엔지니어들은 이걸 덧대기 내지 중구난방이라고 혹평하지만, 결국 세계적으로 고속철도의 주류는 유럽계의 컨셉이 된걸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디렛티시마야 말로 원조 중의 원조인 셈이랄까.
아주 예전에도 이탈리아 어디다 팔아먹었냐고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여전히 이 지적에 대해 조사가 되지도, 시정이 되지도 않고 5번째 고속철도 보유국 드립이 나온다는 점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빼먹은데가 좀 난맥상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유럽계 고속철도 컨셉의 원조에 가까운걸 생각하면 뭐랄까... 족보 사서 양반행세하다 망신을 당하는 그런 그림같단 느낌까지 든달까 그렇습니다. 이런 별로 좋지 않은 지식 리거시는 좀 정리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