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는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철도회사로, 미국인 제임스 롤랜드 모스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자본 모집 부진으로 일본 자본이 장악해버린 그런 회사입니다. 그러다보니 노선 연장이 그리 길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고 해서 철도사의 첫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대접이 좀 미묘한 감이 있습니다.
다만, 재미있는건 일본인들이 남긴 일제시대의 기록을 보면 경인철도는 자신들의 직계로 보지 않는 그런 미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경부철도의 경우 상당히 디테일한 건설상의 우여곡절이 많이 언급되고, 이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신경질적으로 서두르는 일본정부나, 지금 떠벌리는 대륙철도론의 원류를 주장하며 표준궤를 관철시킨 가사이 아이지로 기사장의 이야기라던가, 프랑스 눈치를 봤는지 듣도보도 못한 미터궤 부설과 이후 임시협궤 부설론이라던가, 남성현 가설선이나 증약 가설선 등등... 꽤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편인데, 단 10년도 안지난 경인철도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거의 없이 그저 모스와의 협상과정 이야기가 주가 되는게 좀 뭔가 이건 자신들이 했던 사업이라기는 많이 미묘했던 그런 냄새가 납니다. 물론, 모스가 임명한 기사장(아마도 콜브란)이 시공한 한강교량의 부실을 트집잡는 이야기 정도는 남아있긴 합니다마는.
실제로 경인철도의 기자재는 침목과 레일, 차량, 공장설비, 분기기, 교량까지 전부 미국제 자재와 미국식 설계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기관차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 소재의 브룩스 사(후일 ALCO에 인수) 제조였고, 객차는 델라웨어 주 소재 하를란 앤드 홀링워스(Harlan and Hollingsworth) 사에서 제조되었습니다. 화차는 필라델피아 소재 알리슨 매뉴팩쳐링(Alison Manufacturing) 사에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 나중에 부설되는 한강철교의 트러스 역시 미국 일리노이 스틸의 철구조물 제조 부문에서 제작되어 1898년에 한국에 반입되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역 건물들 조차 미국식의 설계로 만들었다고 하니 미국 일색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일본이 아직 제대로 이런 기자재를 만들 능력이 없는 시점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객화차 조차 끼워넣지 못한 걸 보면 사실상 일본은 자본 참가에 의의를 두다시피 한 그런 상황에 가까웠던게 아닌가도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모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은근히 국내에서는 관심이 없는데, 이 사람은 사실 극동지역 무역에서 미국인 사업자 중 가장 큰 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American Trading Company라는 회사의 오너로서, 요코하마를 거점으로 일본 정부와도 꽤 여러 사업을 진행시켰던 사람이었고, 당시 조선 왕실과도 꽤나 거래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도 지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조선 왕실이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주문한 각종 화기류를 조달해 줘서 꽤나 신임을 얻었던 모양이기도 하고. 물론 극동에 나와있는 미국인의 숫자가 엄청 많은게 아니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줄이 잘 닿아있는 정상 내지는 어용상인에 해당하는 사람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허사업을 받을 수 있던거였고.
물론 아무리 무역업계의 큰 손이라 해도, 19세기 말엽의 무역 물량이라는 것은 어마무지한 그런 건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에 날고기는 상사원이라 하더라도 철도같은 엄청나게 큰 사업을 자기자본과 차입금 만으로 어떻게 해보는건 많이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당시에는 그런식의 사업진행은 매우 위험하고 무모한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개의 철도는 대중 공모를 통해 자본을 모집하는게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모스는 1897년에 뉴 저지에서 경인철도를 위한 자본모집을 시도하고, 실제 당국의 모집 승인을 얻기까지 했습니다만, 이게 불발로 그치면서 결국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 일본의 자본참여를 받게되는 결말을 가져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기 이전에는 저 요코하마 거점의 상사원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결국 일본의 브로커로 돈을 해먹기 위한 수작을 벌인게 아니었냐라는 평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의외로 시도를 많이 했던 셈이랄까.
이 당시의 모집이 실패한건 1894년에 발발해서 1895년에 종결된 청일전쟁 때문에, 전쟁 위험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 당시 미국의 경제상황이라는 변수가 있었습니다. 1893년에 발생했던 공황의 여파가 상당히 심대해서, 1897년 정도는 되어야 그 공황이 수습기미를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공황이 발생한 배경은 아르헨티나발 흉작과 정정불안이 자본시장을 뒤흔드는 등의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나 직접적인 금융불안을 일으킨게 필라델피아 앤드 레딩 레일로드의 법정관리 사건이 있었습니다. 문어발 처럼 확장하다 저리 되어버린 회사였는데, 이때문에 철도업 자체가 상당한 불신을 받던 상황에 빠졌던지라 1897년의 자본 모집에서 이런저런 이슈가 걸려서 실패했던 걸로 보입니다. 여기에 카더라 같긴 하지만, 당시 철강왕 카네기에게 자본참여를 협의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결국은 잘 안풀렸달까.
이런걸 보면 모스는 직접 철도를 건설해 경영하려던 의향은 분명히 있던건 맞는 거 같기는 합니다. 미국에선 강도 남작이라 불리는 제이 굴드나 밴더빌트, 스탠포드 등등 쟁쟁한 자본가들이 철도사업을 바탕으로 대자본가로 성장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모스 역시 이런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의 사업을 벌이기에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고 봤을거고, 이미 철도건설이 진척되던 일본에서도 딱히 기회가 보이지 않았지만, 한국은 아직 철도도 없고 그 권리를 두고 각축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부국강병의 파트너로 생각하던 고종의 심중까지 인지해서 여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봤던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일본 외에도 프랑스의 기술회사인 피브릴(Fives-lille)이나, 독일계의 세창양행, 여기에 러시아까지 부설권을 받아가려고 각축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었던 걸 본다면 사실 시작 자체는 꽤 잘 끊은 셈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좀 더 뒤의 이야기지만 1905년 8월에 당시 유니언 패시픽 철도의 사장이자 당대의 철도 자본가였던 에드워드 해리먼이 일본을 방문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딱히 이 사건에 큰 관심이 없고, 외려 알래스카 탐험을 후원한 이야기가 더 유명한 편입니다만... 일본에서는 "철도왕"의 방문이라고 꽤나 철도사적으로 특기할만한 사건으로 다루는 편입니다. 당시 방문에서 세계를 일주하는 철도를 구축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방문해서, 남만주철도의 매수 협의를 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러일전쟁을 위한 공채발행을 수습하느라 재정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던 일본으로서는 격론 끝에 결국 협상을 파토내버리긴 했습니다마는, 이걸 보면 미국 자본이 극동의 철도망을 사업으로서 꽤 관심있게 보던 상황이었고, 모스 역시 그런 흐름을 꽤 일찍 간파하고 사업 기회를 노렸던게 아닌가도 생각이 듭니다.
뭐 역사는 결국 조선, 대한제국의 노력이 무위로 끝나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으며, 러일전쟁을 빌미로 일본이 경인철도와 경의철도를 부설하게 되면서 사실상 철도의 주도권 역시 그렇게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리는 상황으로 귀결되어 버렸습니다만, 경인철도는 이 압력 속에서 무언가를 시도해 보려던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