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구한말에 미국인에 부설권을 넘겼다 일본에 팔려버린 경인철도와, 일본의 강짜로 부설권이 부여된 경부선, 그리고 서북철도국을 두고 개성까지의 측량선을 뽑고 일부 토공도 착공했다 이를 강제로 뺏겨버린 경의선까지의 이야기는 그런대로 알려져 있지만, 호남선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일제강점기의 기록에서 소외되어 있다 보니 철도사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감이 있습니다. 뭐, 산업화 이후의 정치지형도 이걸 조장한 감이 있기도 합니다마는.
여하간 부설사를 보다보면 호남철도주식회사라는 이름의 회사가 언급되는게 보입니다. 기록상으로 친일파이자 이완용의 이복형인 이윤용이 사장이었던 회사로, 1904년 5월에 부설권을 인가받은 회사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권 거래를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명목상의 회사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 쉽고, 이후 마산선 부설권을 받은 박기종이나 더 앞의 경인철도의 모스 처럼 결국 손털고 돈을 받아 나간 경우가 있으니 그런 의심을 거두기는 어렵기는 합니다.
다만, 좀 재미있는건, 다른 여타 기록에서 호남철도주식회사의 전무였던, 1905년 당시 정3품의 직을 받기도 했던 서오순이라는 사람의 행적입니다. 이 사람은 무려 자본금을 모으기 위해서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혈서를 써 알리기까지 했고, 또 정부에 청원하여 1907년에 1만원의 자금을 받아내기도 하며, 유길준, 신응희, 장박 등 당시의 고관 명사들을 설득해 자금을 모아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조치원에서 강경까지의 철도 부설에 착수해서 측량과 일부 토목공사를 실시하기도 했던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뭐 그 기술공여 원천은 일본인 기사였던 거 같기는 합니다마는.
여기에 기록에는 전주에 호남철도연구회 내지는 기성회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주식 모집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모양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관련하여 이게 별달리 근거가 없는 조직이고, 서오순이 사실상 진지하게 사업을 할 여지가 없다는 기사도 있기는 합니다 (링크). 일단은 앞서 설명한 부분을 보면 대한제국 정부가 이 활동을 인지하고 있던 것은 명백하기도 하고, 실제로 당시 일본 공사가 대한제국 정부에 사실관계를 여러번 조회하고 철회를 압박한 기록이 있는지라, 완전히 개인회사라고 하기엔 여지가 있다 봐야할겁니다. 게다가, 이 기사의 근거자료는 일본인들이 1942년까지 기록한 "전주부사"이기에, 아마도 서술자는 이 사건을 구한말의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영화 시도에 대해서 무의미한 항거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거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거고 말입니다.
이 사건에서 유지들이 반대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매천야록 등의 언급에서는 을사오적인 당시 내부대신을 역임하던 송병준이 이를 방해하는 공작을 했다고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일본이 통감부를 통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철도를 사철로 짓는 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입장을 걸고 있었다는 언급 역시 있기 때문에, 당시의 이완용 내각의 구성원 송병준이 통감부의 촌탁대로 이를 방해했을만한 여지는 충분히 있을거라 봅니다. 즉, 고종을 축으로 한 민족자본운동 성향이 있는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권을 뭉개기 위해 친일 내각이 이를 적극 방해하는 그런 그림이었던게 당시의 배경이었던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더욱이, 기사에 언급이 되지만, 군산이나 익산(이리)에는 일본인 대지주들이 있었고 이들을 축으로 거류민들이 철도부설을 적극 요구하고 있었고, 이때문에 실제 통감부 주도의 호남선 측량은 군산으로의 지선과 목포로의 본선으로 계획되어, 그 기점이 대전으로 바뀐것만 빼고 실현이 됩니다. 반면 서오순은 전주에 조직을 구성하여 주식을 모집하기도 하고, 또 왕실에 줄을 대기까지 한 걸 생각하면 1차 구간으로 연기, 공주를 거처 강경까지 부설한 이후, 그 경유지로 전주를 점찍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결국 내각의 압박을 받은 자본가들이 호응을 하지 않은 결과가 현재 노선으로 귀결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그리 틀린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통감부의 군사상 중요한 철도라는 주장은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기는 합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고 이후 1909년에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의병들을 척살하러 들어가는 등 친일내각의 국가 장악력이 이완되는 걸 일본의 군사력으로 뭉개려 들려는 시점이기는 했으니 말입니다. 도한 일본 정부의 철도에 대한 태도도 국가 통제를 중시하는 방향이 된지 오래인데, 이전 1904년에 러일전쟁을 기회로 국방상의 이유를 바탕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사철로 부설된 주요 간선철도를 강제매수한 전례가 있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후 한참 뒤인 2차대전때도 이건 반복되기도 했고.
당시 일본의 간선철도 매수 자체도 명목상은 국방이지만, 실질상 정부의 경제통제력 확보와 상대적으로 노선망이 약한 국철의 경쟁력 강화를 기도한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통감부의 주장 역시 그런 배경, 즉 일본의 경제와 행정 장악력 강화와 민족자본 운동의 돈좌가 깔려있었을거라 유추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을겁니다. 정작 그렇게 정리한 호남선 철도는 1910년에 바로 착공, 4년만에 개통을 할 정도기는 했지만, 정작 이후의 노선 개량은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전라선이나 경전선(당시엔 광주선으로 여수에 이르는 철도였지만) 사철이 지선으로 부설되는 정도에 그쳤으니, 경부선이나 경의선이 지속적인 개량공사와 교량 및 터널 설치, 지선망 확충이 활발했던거에 비하면 미적지근한 감이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더욱이 서오순의 호남철도가 실제 자본을 마련하지 못한 건 아니었던 걸로 보이기는 하는게, 1909년에 통감부는 부설면허를 취소시킨 보상으로 그 실비 129만원 여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 숫자는 얼핏 보면, 지금의 숫자감각으로 보면 아주 별거아닌 숫자지만, 정작 호남선의 최초 개통시 사업비 투입이 총액 884만원 여였고, 재사용품 가격이 103만원 정도가 나왔다고 언급이 됩니다. 이 사업비 총액의 1/8 정도를 실비, 즉 호남철도가 이래저래 지출한 경비라는 명목으로 물어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에 호남철도의 정관상 자본금이 225만원인데, 저 사업비의 1/5 정도에 해당하는 숫자로, 여기에 차입금 등으로 조달하는 돈이나 구간 영업개시로 어느정도 비용을 만회한다고 보면 아주 택도 없는 숫자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호남선의 건설비는 1911년과 1912년에 논산~대전 구간에서 상당한 수해 피해를 입은 점이나, 상대적으로 조치원 기점일때에 비해서 상당히 열악한 구간을 지나고, 여기에 33킬로의 군산 지선을 더 부설한 거 까지 감안하면, 차입금 비중을 그렇게 키우지 않고서도 건설이 가능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당시 전쟁이나 경제장악 목적의 화폐개혁 등으로 인플레이션이 상당했을 시기였기에 1907년과 1914년의 시차도 감안해야 할거고 말입니다.
즉, 이 호남철도는 의외로 구한말의 여러 철도자영화 시도들 중 가장 유력했던 시도라고 말해도 그리 과한 이야기는 아닐것 같달까 그렇습니다. 물론, 이걸 민족주의에 기반한 액션으로 보는 건 너무 앞서나가는 해석이 되긴 하겠지만, 적어도 일본의 경제장악에 경계심을 가진 하위관료 및 자본가들의 도전이라고 볼 수는 있긴 할겁니다. 전주 경유 논란도 결국 이런 역학관계 하에서 생겨난 이야기일거고 말입니다.